세풍-쌀 풍년 대란(大亂)이라니

입력 2001-09-06 14:35:00

5일 저녁 선산쪽에서 4㎞쯤 떨어진 고아면 신촌(新村)마을 상가(喪家)에서 만난 농민들은 한숨만 내쉬었다. 쌀농사는 풍년이지만 뭐하겠느냐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푸념이다. 들리는 소리는 쌀재고가 엄청나다, 쌀값은 작년보다 떨어질 것이다, 수매가를 동결한다는 등 한마디로 쌀맛 떨어지는 것이고 자신들에게 솔깃한 소리는 아무리 귀를 세워도 한마디가 없어 땅을 칠 노릇이라는 표정이 가득했다. "당장 쌀농사를 걷어 치우려고 해도 수십년동안 몸에 밴 농사를 버릴 수도 없고 딱히 다른 작목을 재배할 용기도 없다. 하기 좋은 말로 복숭아.자두 같은 나무를 심은들 어디 돈이 된다는 보장이 있겠는가". 아버지를 잃은 상주들의 애통한 목소리 만큼이나 농민들의 한탄도 높았다.

풍년농사 망치는 흉년 농정

농정 관계자도 '쌀 풍년 대란(大亂)'이라고 한다. 어쩌다가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이 들게한 농민들의 땀이 되레 짐이 된다는 듯한 의미로 해석될 말들이 오간다. 언론매체에 나온 농정담당 고위공직자는 추곡 수매가 동결이 아니라 안정화(安定化)라고 강변하고 있다. 매년 5%씩 올린 추곡수매가를 내년부터 2%정도 올리거나 그 이하로 하겠다면서도 동결은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높은 지위에 있으면 정치적인 수사(修辭) 구사능력도 상당한 수준일 것이라는 고개 끄떡임이 아니라 솔직하지 못한 행정이 농민들의 불만을 불러온다는 우려가 있다. 딱 부러지게 WTO나 곧 있을 쌀협상 재개 등으로 쌀값 하락, 수매가 동결, 쌀증산 포기 등 정책전환의 불가피성을 집중 설명해야 올바른 농정수행이 아닌가.

사실 지금까지의 정부행태로 보면 매년 쌀은 풍년이었으되 농정은 흉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정부가 올봄까지도 고품질종(高品質種) 재배보다 다수확 품종을 장려했으면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도 올가을의 쌀 수급대책은 쌀의 유통조절로 가격을 유지하려는 정도의 대책으로는 농민들의 반발은 뻔한 일이다. 상가에 모인 농민들은 "새만금 간척사업을 재개하기위해 쌀 재고 문제를 덮어둔 것이라는 데 사실이냐"며 마당이 쩡하며 울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쌀이 남는다는 사실이 집중 부각되었다면 해마다 100만섬 이상의 쌀 생산이 가능한 대규모 농경지 확보사업의 추진은 명분을 잃어 새만금 간척사업 재개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의혹의 제기다. 쌀 수급의 장기적인 전망에 바탕을 둔 정책수립이 아니라는 비판이다.

정부가 최근(4일) 발표한 '2004년 쌀 재협상에 대비한 쌀산업 발전 종합대책'도 논란이 많다. 쌀증산 정책의 내년부터 포기나 품질위주 전환, 추곡수매가 동결은 쌀개방에 대한 대비차원으로 농민들이 이해해야 할 대목이다. 2004년에 재개될 우리나라 쌀시장 개방에 관한 협상을 앞둔 체제의 정비 내지 충격완화책으로 받아 들여야 할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쌀 가격 등을 시장기능에 맡긴다는 인상이 짙다. 그럴 경우 우리나라의 농업기반 유지가 가능할 것인가, 걱정이 앞선다. 농민들이 경쟁력을 갖춰야 하고 이를위해 경영규모를 늘려야 한다. 쌀맛에 대한 신뢰감은 농민들의 몫이다. 정부의 대책은 농민들에게 책무를 넘겼을 뿐 쌀재고 등을 줄일 쌀소비 방안은 뒷전에 밀려나 있다. 기껏해야 북한에 쌀지원, 학교급식때 양질의 쌀 소비 유도 정도다. 누적된 쌀 재고를 줄일 효과적인 방책의 실행이 있어야 '풍년 시름'을 걷어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농업기반.식량안보까지 흔들

흔히 정부는 일본이 내년부터 농가보조금을 대폭 축소한다고 내세운다. 보조금 방식의 직접지원제도가 농가의 자립의지를 해치고 있다는 논리를 곁들여 농업발전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한다. 딴은 그렇다. 농가에 무기한 보조금 지급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1961년 농업기본법을 만들어 40년간 직접 농가소득을 보전(保全)해 주었다. 우리나라의 논 직불제도 시행은 몇년 되지 않는다. 농가가 경쟁력을 높이고 자립할 환경 조성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이 비교되는 대목이다세계 강국들을 보면 농업기반이 튼튼한 나라다. 미국이나 일본.독일 등 소위 G7은 주곡의 자립이 가능한 국가라고 한다. 장기적인 식량안보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지난해 토지개량.산촌진흥 등 농업분야의 공공사업에 투입한 1조7천600여억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최종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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