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오후

입력 2001-08-23 00:00:00

어느 처마 낮은 대폿집에 들고 싶다.따순, 분통같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지분냄새 자욱하여 불콰히 취기가 오른다면

육자배기로, 흘러간 유행가로 질펀 흘러갔으면 좋겠다.

젓가락 장단으로 아, 뚝뚝 꺾어낸 억수장대비의 북채로

동백 동백 같은, 늙은 작부의 상처 또한 붉게 씹으리.

다시 한 사발, 여자의 과거사를 가득 부어 마시면

지리산, 악산 산 거칠수록 더 여러 굽이 굽이굽이 풀려서

그러나 물이 불어 시퍼렇게 자꾸 깊어가는 섬진강.

저 긴 긴 목울대 치받치며 끄윽 끅 꺾이며 흘러가는 거

보라, 逆鱗 떨며 떨리며 대숲은 섧고

또 섧다 난분분난분분 매화 뿌린다.

-문인수 '매화'

시인은 어느 봄날 매화가 난분분하게 휘날리는 섬진강 어귀에 서 있다. 난만한 매화가 아름답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美感은 봄날의 매화와는 어처구니없게도 싸구려 분냄새가 자욱한 처마 낮은 대폿집으로 달려간다.

늙은 작부의 상처처럼, 강도 산이 거친 악산일수록 더 여러 굽이 풀리고 푸르게 깊어진다는 믿음에 도달한다. 이 믿음에서는 逆鱗(역린-왕의 노여움)조차 거스를 수 있는 시인의 꼿꼿한 결기가 느껴진다. 물론 그 결기 뒤에는 누추한 인생에 대한 깊은 옹호가 있다.

김용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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