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홍칼럼-경쟁만능주의를 경계한다

입력 2001-08-20 14:01:00

세월을 속일 수 없다보니 요즘은 제자들로부터 결혼식 주례를 부탁 받는 일이 점점 잦아진다. 한 때는 내가 아직 장가가도 시원찮은 나이라고 강변하면서 거절도 해보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주례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때마다 주례사를 준비한다는 게 여간 번거롭지 않다. 그래서 아예 기본 주제를 하나 정해 두고 약간씩만 변화를 주기로 했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은 진부하고 상투적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인생을 갓 출발하는 신랑.신부에게 사랑하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아서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라고 뭐 별다른 존재인가. 그렇다고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해버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어쨌든 인간은 다른 생명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소중한 존재이어야 한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 이외에는 다른 해답이 없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하는 유일한 통로다. 내가 내 자체로서 특별히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내가 있어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나도 비로소 소중해지는 것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웬 늘어진 사랑타령이냐고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리는 항상 멀리 있지 않다. 어렵다고 그 어려움에 갇힌 채 마냥 쳇바퀴만 돌아서야 어찌 그 어려움을 탈피할 수 있을 것인가. 주변 여건이 어렵고 각박할수록 한번씩은 훌훌 털고 인간 본질의 문제를 조용히 되싶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신랑.신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 사랑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우리는 그동안 숨가쁘게 달려왔다. 많은 것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지금의 사회경제적 혼돈상은 어찌보면 우리 탓만은 아니다. 운이 나빴다고나 할까, 천신만고 끝에 이제 간신히 산업사회적 경쟁력을 어느 정도 갖추어가던 마당에 탈산업사회적 인류문명 대전환의 급류에 휩쓸리게 되었으니 일정한 혼란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와중에서 자칫 중심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는 데 있다.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급류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허우적거리는 줄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행위를 즐기기까지 한다면 이건 정말 큰 일이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산업사회건 정보화사회건 그 차이는 수단의 차이일 뿐이다. 어느 사회건 추구하는 바 지향성은 동일하다. 사회구성원들인 인간의 행복 추구가 그것이다. 인간의 행복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이 우선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결국 사랑이라는 주제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사랑의 사회적 표현 형태는 더불어 살기이다. 더불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지향성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절대 명제이다. 단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구체적 실현 형태가 달라질 뿐이다.

더불어 살기를 시대에 뒤떨어진'원시적 본능'으로 치부하면서 그러한 지향성을 하루빨리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객들이 있다. 경쟁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착각하는 논객들이 판을 친다. 이러한 경쟁 이데올로기만으로는 우리 사회가 천박함을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 천박성을 방치하고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경쟁 그 자체도 제대로 치루어낼 수 없다. 바야흐로 문화경쟁의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천박한 경쟁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경쟁이란 더불어 사는 격조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적절히 사용되어야 할 유효한 수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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