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가을의 단상

입력 2001-08-18 14:33:00

밖으로 나와 본다. 하늘이 며칠 사이에 성큼 높아졌다. 무더위속에서 가을의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평사낙안(平沙落雁) 하듯 스며든 가을. 높다란 천공에 어린 순수한 투명과 그 투명함을 감싸고 있는 여린 빛.

숲을 거닐어 본다. 공해가 그만큼 멀어지는 것 같다. 생명이 숨쉬는 산등성이에서 정적속에 깃든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내밀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서 얻는 것은 욕망과 방종이 아니라 겸허 뿐이기 때문이다.

무변의 공간애 내 한 존재가 놓일때 홀연히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겸허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인가. 사색이 없고 정감어린 언어가 오가지 않는 이 적막한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을 정말 겸허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줄 안다. 인간이 서로 화목할 수 있는 언어를 잃을 때 모든 존재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생에 대한 깊은 사색 없이는 예지의 샘이 고일 수 없다.

간명(簡明)의 미학

지금 우리는 정신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인간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가 소리를 내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아픔은 생명의 표현이다. 아픔을 안다는 것은 생명을 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아픔을 너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픔을 모르는 현상은 이제 주변환경에까지 다가와 있다. 자연파괴를 발전으로 안다면 큰 잘못이다. 바람, 비, 쪼이는 햇살은 자연도태의 한요인이긴 하나 오늘날은 인위적 도태가 너무도 극심하다. 자연의 인과성은 자연 그 자체에 맡겨야지 그것에 대립한다면 마지막에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생각할수록 불길한 예감이 든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향락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보다 자연의 인과를 몸으로 깨닫고 외출한 주부들이 수줍게 서점을 찾아 수필집 한권을 사드는 그런 사회가 왜 이렇게 간절해지는 것일까. 아직도 우리는 수필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수필은 지식의 산물이 아니며, 자기 생각의 강요는 더욱 아니다. 조용히 들려주는 노변담(爐邊談). 그러면서도 인생을 보는 지혜가 여울처럼 흐르는 글이 수필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내가 '램'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라는 난해한 소설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나, 그는 '호머'의 원전을 읽은 것이 아니라 아동용으로 고쳐쓴 '율리시즈의 방랑'을 읽고 썼다 한다. 이 '율리시즈의 방랑'을 저술한 사람이 다름아닌 수필가 '차알즈 램'이었다. 그가 남긴 '엘리아 수필'안에는 경묘한 공상, 유현한 상상, 인간에 대한 따뜻한 동정과 애환이 혼연히 결합되어 더없이 고아(古雅)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음을 본다. 어둠에 눈이 익으면 사물의 정체가 확실해지듯 기품있는 수필은 읽으면 읽을수록 삶의 진실을 정확히 보여준다. 조용한 시정의 생활인으로 자족하면서 인생을 옛도자기와 같이 사랑하고 다시 상감처럼 일상을 문장속에 섬세히 새겨넣은 관조자가 '램'이라 할 수 있다.

뜨거운 사랑의 교신이 없는 인간관계는 죽음의 세계 그것이다. 언어는 사색의 흔적이듯 사색을 해야만 언어의 형상화가 이루어질 것이 아니겠는가. 허술하게 보아넘긴 것들, 이를테면 노을이 드리워진 산그림자, 흐르는 강, 낡은 토담, 아무렇게나 뒹구는 조약돌 하나 하나에 애정을 쏟을 수 있는 회귀(回歸)는 결코 꿈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

사람들은 흔히 단순한 것은 풍경이 아닌 줄로 안다. 그렇지가 않다. 들꽃보다 인공으로 재배한 겹꽃이 훨씬 보기 싫은 법이다. 그림도 겹겹으로 물감칠을 한 정체불명의 그림보다 단순화한 한줄의 곡선 쪽이 더 아름다운 경우가 많다.

문체(文體)란 것도 다를 것이 없다. 복잡한 문체는 본인은 만족할지 모르나 읽는 사람에겐 불결하게만 비친다. 어떻게하여 불필요한데를 깎아내고 순수한 부분을 남길 것인가에 문장의 비결이 있는 것처럼 인간관조에도 이런 간명(簡明)의 미학이 필요하다. 바람이 끊기는 틈새로도 인간과 자연을 볼 수 있고 또 그것이 흘러가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자연이나 인간은 복잡한 것 같으나 의외로 단순한 것인지 모른다.

윤장근(죽순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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