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명을 찾아서

입력 2001-08-06 15:21:00

(14)뚤룸-카리브해의 고대무역항

우리의 답사는 이제 끝에 가까이 와 있었다. 멕시코 고원의 떼오띠와깐에서 시작하여 치아빠스주를 지나 깜뻬체주를 경유, 이제 유카탄반도 끄트머리에 도달한 것이다. 세모꼴 유카탄반도는 셋으로 나뉘는데 서북쪽은 깜뻬체주, 그 한가운데는 유카탄 주, 그리고 동남쪽은 킨따나로 주가 된다. 2월 12일 어제 우리는유카탄주를 넘어, 저녁에 킨따라노의 깡꾼에 당도하였다.깡꾼은 1970년 로페스 포르티요 대통령이 국가적 차원에서 개발을 한 중남미 최대의 휴양도시이다. 전세계망을 가진 10여개의 초특급 호텔을 포함해서 120개 넘는 관광호텔들과 각종 위락시설이 카리브해 따라 순백의 모래해안에 밀집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여기저기 잘 보존된 마야의 유허지가 있어, 유적에 대한 신중한 배려가 빛나 보이는 바, 마야유적이 없었더라면 깡꾼은 어지러운 관광도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1m높이 석벽 380m 뻗쳐

뚤룸은 깡꾼에서 정남으로 127km 떨어져서, 곧은 도로를 버스로 달려 1시간 반 걸리는 해안가에 위치한다. 내륙에 자리한 대부분의 마야 도시가야생의 삼림과 어울려 있지만, 뚤룸은 비취빛 바다와 어우러진 경관이 더욱 뛰어나다. 치첸잇사나 우슈말에 비해 높다란 신전은 없지만, 아름다운 경관만큼이나 그 지리적 입지로 볼 때 뚤룸은 마야 문명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것이다. 주차장에 내려 유적 입구에서 해안에 위치한 뚤룸까지는 걸어서 20여분 거리이다. 그 사이를 운행하는 간이열차를 기다리는 관광객을 위해 공중 장대에 거꾸로 매달려 회전하는 또또나끄('나르는 사람들'을 뜻함)라는 멕시코 전통의 서커스가 공연된다.

뚤룸은 마야 후기고전기인 12~16세기에 성장 발전한 자그마한 도시이다. 언뜻 군사요새로 착각하기 쉽지만, 교역으로 번창했던 항구도시이다.'벽'(壁)을 뜻하는 마야 말 뚤룸처럼, 유적지는 전체가 1m 높이의 나즈막한 돌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야에서는 드문 성곽도시로, 성곽은 바다쪽을빼고 삼면을 감돌고 있는데, 남북해안을 따라 길이는 380m, 동서 폭은 170m에 이른다.

지금은 성 안의 유적만이 보존 복원되어 있지만, 실상은 성밖에도 많은 집터가 있었던 것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관료, 승려, 전사로구성된 지배계급, 장인층으로 이루어진 중간계급은 이 성곽 안에, 그리고 농민, 수렵민 등으로 이루어진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성 바깥에 거주하고 있었다. 위의 두 계급 사람은 성곽 안에 그리고 하층민들은 성밖에 살았다고 한다.

성 안팎을 드나드는 출입문은 세 곳에 있는데, 함께 두 사람 정도가 겨우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좁으며, 그중 서쪽 한 곳으로만 관광객이 줄지어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줄지어 들어가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해안단구 상에 좌우로 길게 펼쳐진 30여개의 마야 건축군이다. 대부분 폐허가 되었는데, 그 사이로 많은 관광객들이 안내원을 따라 떼를 이루어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었다. 황량하고 고풍스러워야 할 고대 마야유적이 북적되는 관광객들로 뚤룸은 시장판과도 같았다.

◈건축양식 다양 외부교류 역력

바로 입구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입구 바로 정면 동쪽으로 보이는 '까스띠요'(스페인말로 성을 뜻함)이다. 해안 절벽 바로 위에 있어 이건축물의 전모를 살필 수 있는 곳은 입구 서쪽에서이지만,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경관은 까스띠요 남쪽이나 북쪽의 '바다의 신전'이나 '바람의 신전' 자리에서 보아야 한다. 이 까스띠요는 다른 마야의 신전에 비해 높지 않으나, 바닷가 절벽에 있음으로 해서 상대적으로 더 높아 보인다. 1517년 쿠바에식민지 전초기지를 건설한 스페인 총독 코르도바의 명령을 좇아 그의 조카 후안 드 그리할바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는 이곳 유카탄 해안을 종주하게 된다.도중에 스페인의 아름다운 항구 세빌르 못지 않은 타운을 발견하였다고 보고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 뚤룸인 것이다.

바다에서 눈에 먼저 뜨이는 건물은 당연히 이 까스띠요로서 그들은 이를 바다를 조망하는 타워로 착각하였는데, 실제로 바다 쪽으로는 창이 나 있지 않다. 내륙 방향에서 30여 계단을 올라가 두 개의 기둥이 받쳐 있는 회랑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스페인 정복이후 도시 황폐화

그리할바가 처음 이곳을 찾은 지 200년이 지난 1842년 당시 뚤룸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 것은 미국인 스티븐스와 영국인 케세우드이다. 젊은 건축가 케서우드는 석판화로서 이 까스띠요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였고, 그것을 근거로 무너진 상당한 부분이 복원되어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상단 정면에 두팔과 다리를 벌리고 거꾸로 하강하는 모습의 신이 부조되었는데, 이 신의 조각은 뚤룸 건축물 여기저기에서 확인된다. 케서우드가 그린 또하나의 석판화에는 성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첫 번 마주치는 건물이 묘사되었는데, 빗물을 받는 시설이 있다 하여 '물동이 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두장의 석판화를 통해 뚤룸은 지금과 달리, 발견 당시에는 울창한 삼림 속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스페인 정복 이후 이곳에 인적이 끊어지고, 1847년부터 1901년까지 마야인의 대 정부 항전기간 동안에 이곳은 게릴라 아지트가 된 것이다.

까스띠요 북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바람의 신전이 있다. 바람의 신전은 그 이름처럼 날렵한 모습으로 해안절벽에 서 있었는데, 이곳에서조망되는 까스띠요와 카리브해 바다, 순백의 모래해안은 가히 환상적이다. 바람의 신전과 까스띠요 사이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작은 만이 형성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수영을 즐기는 장소는 뚤룸에서 이곳 뿐이다.

◈100년전까지 게릴라 아지트로

뚤룸에 살던 마야 주민들은 중앙아메리카나 멕시코 고지대로부터 물자를 교역하는데 열심이었다. 그 물자는 꿀, 생선, 소금, 흑요석 등 생활필수품이대부분이었는데, 이를 실어나르는 부자상인들은 멀리서 장인들을 데려와 뚤룸의 건축물을 만들고 장식하였다. 이곳에서 보이는 건축양식과 장식에 치첸잇사, 똘떼까 등의 먼 지방 양식이 보이는 이유가 이에 있는 것이다. 물자를 싣고 내리는 배의 정박처가 바로 이 까스띠요와 바람 신전 사이의 모래 해안이며, 이에 바로 가까운 공터에 시장이 섰다고 추정되고 있다.뚤룸은 내륙의 어느 마야 도시 못지 않게 마야 사람들이 많이 오고갔던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 드나든 것은 교역을 위해서이지만, 16세기초에 스페인 사람들은이곳을 정복하기 위해서 왔다. 그리고 19세기에 미국과 유럽사람들은 탐험과 발굴을 위해, 그리고 이제 휴양삼아 세계 전역의 사람들이 이곳을 왔다 간다. 급기야는 카리브해의 고대 마야도시 뚤룸은 2001년 정초에 지구 반대편의 우리 한국 답사팀을 맞이한 것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