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뻐꾸기 소리

입력 2001-07-07 14:41:00

이른 봄날의 경쾌한 종달새의 노래나 아침 일찍 처마끝에서 지저귀는 참새 소리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산골의 딱따구리 소리는 명랑하고, 비둘기 소리는 이국적인 여수(旅愁)를 담고 있다.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까치 소리, 하이소프라노의 꾀꼬리, 흉내내는 앵무새도 있다. 그뿐인가 티티새, 울새, 굴뚝새, 방울새 등 온갖 종류의 새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아름답게, 또 부드럽게 한다.

많은 새소리 가운데서도 뻐꾸기 소리는 매우 특이하다. 듣는 이의 정조(情調)에 따라 노래이기도 하고 울음이기도 하다는 시인의 주석이 아니더라도 뻐꾸기 소리는 아무래도 우는 편인 것 같다. 한(恨)을 내뱉는 듯 나지막하게 혹은 어떤 것을 애절하게 부르는 듯한 그 소리는 "피를 가슴에 지닌 채 토하지 못하는(중국의 이향군) 깊은 곡절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뻐꾸기 소리는 나를 경북 영천 금노동 고향집 여름 마루로 데려간다. 검은 머리를 단정히 빗고 마루에서 바느질을 하시던 엄마와 함께 뻐꾸기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디서 들려 오는지 분명하진 않았지만 금호강을 건너 과수원을 지나 소나무가 울창한 죽림사(竹林寺)로 가는 산속에서 우는 것 같았다.

연록의 잎새들이 자라는 5월부터 울기 시작하는 뻐꾸기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한층 더 슬피 울었다. 여름 내내 울다가 가을에 접어들면 뻐꾸기 소리는 자취를 감춘다.

중국의 촉나라 망제(望帝)가 나라를 저어한 나머지 죽어서도 죽지않고 그 넋이 뻐꾸기로 화했다는 전설이 있고 보면 그 울음은 심상치가 않는 것 같다 하나 그것은 구슬프게 들리는 뻐꾸기의 울음에 대해 윤회설을 적용한 동양인의 해석이 아닌가 싶다. 중국에서는 두견새, 불여귀(不如歸), 귀촉도라고 불리우는 뻐꾸기는 옛부터 시인의 사랑을 받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뻐꾸기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갈길은 한없이 멀고 두 귀는 멀리 열린다'는 서정주 선생의 시구가 떠오른다. 뻐꾸기 소리는 영원의 선상에서 하나의 점인 인생의 무상을 암시하는 것 같다.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라. 뻐꾸기는 어느 하늘 아래서고 울고 있지 않는가. 소나무 우거진 선산 할아버지 무덤가에서 울고, 산골짜기에 홀로 서 있는 망부석가에서도 운다. 산길을 가는 행인의 괴나리봇짐 위에서 우는 뻐꾸기는 고적한 마을 흙담 위에서도 운다. 주춧돌만 간신히 남아있고 기와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이로 잡초만 무성한 폐허에 서면 뻐꾸기는 인간의 무력함을 운다. 부귀영화도 흥망성쇠의 그늘에 묻혀 한낱 지나간 성대(盛大)의 무상을 전하고 있는데….신라 천년의 찬란한 자취도 사라지고 지금은 옛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는 경주 월성의 폐허에도 뻐꾸기는 울고 있다. 인간의 죄상을 베수비오스 화산의 불길로 멸망시켰다는 뭄바이, 용암이 쓸고 간 터에 이끼 낀 기둥들을 해골처럼 안고 쓰러져 있는 로마시대의 유적지에서도 뻐꾸기는 운다. 지혜로운 철인들은 오간데 없고 지금은 관광객들의 발자국 소리만 대리석 기둥에 메아리져 돌아오는 아테네의 신전, 그 희랍의 옛터에도 뻐꾸기는 운다. 수정같은 침묵을 깨트리고 뻐꾸기는 철저한 멸망의 미학에 대해 통곡하고 있는지 모른다.

온갖 신비와 고뇌를 담은 뻐꾹새의 그 복합적인 소리에는 결코 인간이 모방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파장(波長)이 있다. 이것은 인간과 새와의 세계를 구별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시점에 가서는 인간과 새를 일치시키는 그 어떤 것이리라. 그래서 인간은 뻐꾸기의 슬픈 울음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서속에 시로 남고 영감으로 남는 뻐꾸기 울음은 고전(古典)처럼 영원히 살아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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