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육상 마라톤의 대부 정봉수 코오롱 감독이 5일 오후 10시30분쯤 서울 중앙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황영조, 이봉주 등 한국마라톤의 대들보들을 키워내 올림픽과 보스턴마라톤대회를 제패한 정 감독은 지난 96년 가을 당뇨가 합병증으로 악화, 중풍으로 쓰러진 후 치료받아왔으며 이날 오후 10시쯤 서울 송파구 방이동 코오롱 마라톤팀 숙소에서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세상을 달리했다.
정 감독이 유명을 달리하는 순간에는 그동안 정 감독의 그림자가 돼 뒷바라지를 해온 김순덕 주무와 엄재철 코치가 지켜봤다.
'고독한 승부사'로 불린 정 감독은 지난 90년대에 한치의 오차가 없는 조련술로 선수들을 훈련시켜 한국마라톤이 40년간의 암흑기에서 벗어나 세계 정상으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어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다. 정 감독은 일본의 여러 육상팀으로 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았지만 단호히거절하고 국내에서 마라톤의 뿌리를 튼튼히 했다.
김천 출신으로 증산초교와 시온중을 거쳐 시온고에서 경북도의 단거리대표로 활약했으며 육군에 투신, 20여년동안 육군팀 육상코치를 지내다 상사로 전역하며 87년 코오롱에 발을 들여 놓고 마라톤과 질긴 인연을 맺었다.
집념과 열정의 마라톤 대부
정봉수 감독은 한국마라톤이 40년(1950~90년)간의 암흑기에서 벗어나 90년 이후 세계정상으로 재도약하는 토대를 닦은 한국마라톤의 산증인이었다.
한국마라톤에는 정 감독 특유의 오기와 집념, 열정이 담겨 있다.
세계기록을 향한 끊없는 야망, 식이요법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지도방식, 번득이는 레이스 전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지옥훈련 등 어떤 찬사도 그를 설명하는 데 충분치 않다.
정 감독이 운명과도 같은 마라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87년 3월이었다. 코오롱 이동찬 회장이『마라톤팀을 만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한번 따 보자』며 감독직을 제의했고 그해 5월 코오롱빌딩에서 김완기와 이창우가 창단 멤버가 돼 팀이 출범했다. 출발은 초라해 보였지만 정 감독의 스타르타식 훈련 속에 코오롱마라톤팀은 세계 정상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첫 실험무대였던 90년 3월 동아마라톤에서 김완기가 2시간11분34초의 한국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그후 황영조가 92년 2월 벳푸마라톤에서 2시간8분47초로 준우승, 꿈에 그리던 마의 10분벽을 돌파했고, 내친 김에 그해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56년만의 손기정의 한을 풀었다.
이때부터 정감독에겐 「한국마라톤의 대부」란 칭호가 따라붙었다.
정 감독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최고기록을 목표로 스퍼트를 계속했다. 황영조가 96년 은퇴했지만 대신 이봉주가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건국대에 다니던 김이용이 입단,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96년 가을 정 감독은 승부사로서 최대 위기를 맞았다. 50대 들면서부터 앓던 당뇨가 합병증으로 악화, 중풍으로 쓰러진 것이다.
황영조의 은퇴에 따른 심리적 충격이 컸지만 정 감독은 병상에서 투혼을 불살랐고 이봉주는 98년 4월 2시간7분44초의 한국신기록으로 4년전 보스턴에서 황영조가 세운 종전 기록(2시간8분9초)를 경신, 보답했다.
그러나 세계최기록에 도전하던 정 감독의 꿈은 뜻밖에 집안에서 터진 싸움 탓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99년 10월 코치 인선을 둘러싼 내부 잡음 끝에 이봉주와 권은주 등 선수들이 코치들과 보따리를 싸고 떠났다. 이로 인해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됐고 그는 병마의 고통보다 더한 인생의 덧없음을 곱씹으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그 사이 수제자 이봉주는 삼성에서 둥지를 마련해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정 감독은 영광과 좌절을 함께 한 마라톤 인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도전(세계신기록 수립)은 아직한국마라톤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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