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상화탄생 100돌 봄은 왔는가

입력 2001-07-04 14:15:00

◈(8)상화의 형제들

상화의 형제들은 모두가 한시대를 풍미한 인물들이었다. 엄격한 교훈속에 자란 명문가의 아들답게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상화형제들의 문학성이나 지사(志士)적인 면모도 그같은 집안 배경에서 싹튼 것이다.

상화의 형제들은 부친 이시우(李時雨)와 모친 김신자(金愼子) 사이에 출생했다. 집안이 여러 대에 걸쳐 대구에서 살아 온 대구 토박이로 시골에서 행세하는 선비 집안이었으며 가정도 비교적 넉넉했다. 그래서 상화가 네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형제들은 백부의 절대적인 지원과 가문의 보호아래 가난을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상화의 형제들은 어릴때부터 사촌들과 함께 가정의 사숙에서 백부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백부의 훈육과 더불어 상화 형제들의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목우 백기만은 '상화와 고월'에서 "상화의 어머니는 심성과 자태가 후덕하고 수려해 대구의 명류부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국량있고 관대한 처사로 대구 여류사회의 신망이 절대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같은 어머니 슬하에 성장한 상화의 형제들도 체격이 당당하고 포용력 있는 인물들이었다. 목우는 이와관련 "상화의 4형제는 모두 출중한 인물들이니 세간에서 '龍(용).鳳(봉).麟(인).鶴(학)의 사형제'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상화의 형 이상정은 독립운동가요 장군이었다. 일본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오산.경신.계성.신명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에 앞장서던 그는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1923년 만주로 망명을 했다.

북만주에서 2년 가량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류동열.최동오 등과 함께 중국 국민군 정규 소장참모로 항일전선에 투신했다. 상해와 남경.북경 등지에서 중국의 군벌.학자들과 교유하는 한편, 김구.김규식 등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유대를 가지며 윤봉길 의사에게 폭약을 구해주기도 했다.

1937년 중경육군참모학교 교관, 1938년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외교위원과 신한민주혁명당 중앙위원겸 군사부장, 1941년 중국 육군유격훈련학교 교수를 거쳐, 이듬해 화중군사령부의 고급막료로 남경.한구 등지의 대일전에 참전했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본진주 중국군 사령부 중장으로 내정됐으나 진주 중지로 물러난 상정 장군은 김홍일 장군 등과 전후 중국의 동포 보호문제에 진력하다가 1947년 10월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귀국, 두달뒤 뇌일혈로 풍운의 삶을 마쳤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상화의 아우 이상백은 우리나라 역사학과 사회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한국체육의 국제진출에 초석을 마련한 인물이다. 그가 역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큰형인 이상정 장군 등과 같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가문의 영향이 컸다.

항일운동과 정치활동에도 관여하는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이력을 소유했으며, 훤칠한 키에 미남의 매너좋은 신사였지만 오십이 넘어 혼인을 했다. 상백은 대구고보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사회학과 동양학을 연구했다.

해방전 진단학회 창립에 참여했고 그후 서울대 사회학과와 한국사회학회를 창설했으며 서울대박물관장을 역임하고 훈민정음을 해설한 '한글의 기원'이란 저술도 남겼다.

그는 체육이론가.체육행정가.체육계지도자로 눈부신 활약을 하며 한국체육회장.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될 만큼 명성을 날렸다.

상화의 형제들은 모두가 문장이 뛰어났다. 상정은 시서화 뿐만 아니라 전각의 명인이었고, 궁중비사.역사기행문에도 뛰어나 유고집 '중국유기'(中國遊記)를 남겼다. 상백은 금성(金星) 동인으로 '내 무덤'.'어떤 날' 등의 시를 발표했고, 간결하고 함축성 있는 명기행문 '영동풍설'(嶺東風雪)을 쓰기도 했다.

상화의 막내 아우 이상오도 청년시절의 시작노트 '취집'(醉集)이 최근 발견됐는데, 시 '마음'.'시인' 등이 1924년 재일 대구인들이 만든 '달성구락부' 회보에 게재되기도 했다. 상화의 형제 중 가장 특이한 이력을 가졌던 인물이 막내 상오이다.대한사격협회 회장을 지낸 그는 우리나라 수렵문화의 개척자로 수렵기와 야생동물기의 저술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각 신문에 '수렵야화' 등을 연재해 호평을 받았으며, '사냥'.'세계명포수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상화의 형제들은 모두가 한시대의 역사를 개척한 풍운아들이었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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