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고(緣故)주의를 지양하고, 법치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국정쇄신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정치와 경제도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법이 정한 절차와 능력에 근거해 인사를 하여야 민주주의 및 시장경제 제도가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고주의(Cronism)'란 사적인 인간관계를 통하여 일을 처리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연고주의가 법치주의를 압도한다면 공공제도는 불신을 받고 혼란이 일어난다. 연고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누가 법과 질서를 지키겠는가. 최근에 발표된 한 표본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법보다도 권력과 돈에 의존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혈연, 학연 및 지연을 통한 비공식적 인맥을 통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른바 '가신정치' '족벌경영' 그리고 '지역감정' 등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은 때로 한국형 병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날처럼 투명성과 책임성을 강조하는 세계화 시대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공공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연고보다 능력과 경험을 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공직자들이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근거하여 중요한 정책결정과 인사를 한다면 권력자들에게 진실이 그대로 전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폐습이 만연될 때 정치불신도 심화된다. 예컨대 여야가 다같이 지연과 학연에 따라 정파를 형성한다면 거기서 소외된 세력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파벌의 지도자들은 집단적 이익에 입각해 상호간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 합의를 도출하고 있다. 현재 고이즈미 총리는 이 파벌정치를 개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정파들은 개인적 친분관계를 통하여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이 결과 각 정파의 지도자가 부침할 때마다 파벌들도 이합집산하곤 했다. 이것을 목격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가족 구성원 이외에 누구도 믿지 않으려는 것이 한국사회의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혈연적 연고가 강하면 강할수록 공적인 절차와 규칙에 대한 신뢰는 약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고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인정이 많고 효도와 충성을 중시하여 정치와 경제활동에서 거래비용을 절감했던 것이다. 불확실한 환경과 격동이 반복되던 시점에 재벌총수들은 신속한 결단을 내리고 방대한 조직들을 통솔하기 위해서도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다. 경제사정이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가족 구성원들과 친척들은 서로 의존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족의 복지를 위해서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태도는 한국의 높은 경제성장률과 교육열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이것이 도를 넘으면 능력은 무시되고 심지어 공식적 법 절차도 불신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선진국을 지향하여 국가경쟁력을 되살리려고 한다면 과도한 연고주의는 청산해야 한다. 지금 가속화되고 있는 정보와 금융의 세계화에 효율적으로 부응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각 분야에서 직업주의 정신을 적극 배양해야 한다. 인터넷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일반시민(네티즌)들의 지적 수준과 정보력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상식의 선을 넘는 연고주의가 자행된다면 그것은 민심의 이반을 일으킬 것이다.
궁극적으로 연고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법치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상식과 법을 도외시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으레 반동을 초래한다. 이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적법절차는 정착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권과 지도자가 바뀌더라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법과 제도이다. 운동경기에서처럼 우리의 공공생활에서도 능력위주로 선수들을 뽑고 그들이 게임의 규칙을 공정하게 지키는 제도를 키워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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