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시론-인간의 존엄을 생각한다

입력 2001-06-22 00:00:00

아직 장마전선은 한반도 남단에도 이르지 못했지만, 며칠 전 내린 비로 전국이 해갈을 맞이했다. 90여년만에 찾아온 극심한 봄가뭄 때문에 논밭이 타들어 가고 강줄기와 저수지까지 밑바닥을 드러냈었다. 근 석달간 비를 기다리던 간절한 마음은 농민뿐만 아니라 도시민들에게도 한결 같았다. 마른 하늘을 쳐다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불같은 시련이라도 만난 듯 가슴을 조이기도 했으리라. 김대중 대통령도 오죽했으면 기우제라도 치르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을까. 그 메말랐던 천지가 단 하루 이틀만의 단비로 생기를 되찾았다. 인공강우실험이네, 양수기네, 소방차네 하고 온갖 안간힘을 다해본들 하늘에서 내려주는 하루 이틀의 비에 비길 수 있으랴.

필자는 솔직히 인간의 한계를 시인하고자하며,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양 믿고 떠드는 인간의 교만과 무지를 탓하고 싶다. 인간의 교만은 과학기술의 무한발전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했고, 우주를 정복할 수 있다는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그 양을 채웠고, 복제양 돌리와 인간 배아 복제술의 개발에서 그 최절정에 다달았다. 이제 인간이 이 기술을 가지고 마음만 먹는다면 유전병 치료술이 아닌 인간개체의 복제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바로 그날 인간은 신이 되고, 일찍이 '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니체의 허무주의는 초인이 아니라 바로 신이 된 인간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인간의 삶 속에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고통을 우리는 생존하는 동안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다. 그것이 유전적인 병인에서 비롯된 질병의 고통이건 후천적인 질병의 고통이건 인간의 삶에 고통은 인간심성에 자리한 죄악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게 마련이다. 그러한 갖가지 고통이나 심지어 피할 수 없는 사회적 갈등이라는 한계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은 죽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삶 속에서 인위적인 죽음은 결코 선한 길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인생이라도 자살이 그 돌파구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몇몇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생명연장이나 생명의 고통을 치유하는 연구결과를 얻으려는 시도는 결코 선한 길이 아니다. 반윤리적이요, 부정의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동서양의 오랜 보편적 진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날 유전공학과 생식의료기술의 발달로 이 진리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착상 이전의 인공수정란에서 배아 간세포를 추출한다면 놀라운 불치병 치료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치료술을 포함한 BT산업은 장차 IT산업을 능가하는 국가경쟁력의 견인차가 되리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의 한계에 머물러야 한다. 신은 죽을 수 없는 분이며,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우리는 인간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그 고통을 인간의 한계 안에서 완화하고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연구하고 확립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않는 한 고통보다 더 큰 재앙이 인간을 엄습할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눈앞의 목표물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존엄성의 정상궤도를 일탈하면 인간은 우주의 미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 금기의 문은 결코 열려서는 안된다.

김일수.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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