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에 시들해 질 때 황룡사에 가 보라. 저 텅빔과 느림이 주는 미학적 공간, 넉넉한 여백이 주는 안도감, 시공을 초월한 사랑도 만날 수 있으리라. 황룡사는 해질 무렵이 제격이다. 구층 목탑이 있던 주춧돌에 앉아 선도산 능선을 물들이는 저녁놀을 보라. 분황사 저녁종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온갖 번뇌가 한갓 티끌에 지나지 않음을, 헛된 망상에서 사로잡힌 세속의 때를 정화시켜 준다.
나는 황룡사 목탑지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신라로 거슬러 가 본다. 또한 천년 전 한 사랑을 꿈꾼다. 지혜로웠던 선덕여왕, 하늘 아래 가장 귀하신 몸을 짝사랑하다 상사병으로 몸져누운 떠꺼머리 총각 지귀. 어느날 왕궁을 몰래 빠져나온 선덕은 지귀를 찾아 간다. 잠든 지귀의 가슴팍에 가장 아끼던, 살붙이나 다름없는 팔찌를 놓아준다. 지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어보곤 휑하니 다시 임금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홀연 잠에서 깬 지귀, 온 생을 다바쳐 사랑하고자 했던 여인이 깜박 잠든 사이에 다녀간 것을 알고 끝내 심화(心火)가 터져 영묘사 절 하나를 몽땅 태운다. 그 불타는 모습을 한 여인은 또 얼마나 가슴 아프게 지켜 보았을까? 이 지극한, 전설같은 사랑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가장 낮은 신분의 민초(民草)까지도 위무해주던 여왕의 백성 사랑이야말로 가장 신라다운 정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찬연했던 제국이었다. 동방의 조그만 나라, 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열강의 각축 속에도 천년 왕조를 고스란히 지켜낸 사실은 경이로움 자체이다. 세계 역사 속에서도 희귀하다. 신라 정신의 총화였던 황룡사는 지금 들판 가운데 버려져 있다. 버려져 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황룡사는 비어있음으로 하여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정반합의 원리다. 빽빽히 다 채워 숨이 막히는 행복결핍증 시대에 황룡사의 미학은 우리 시대의 정신적 몽리면적을 넓혀준다. 삶에 찌들 때 황룡사에 한번 가 보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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