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정신의 상징인 퇴계 이황선생의 탄신 500주년 기념사업이 올해 경북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출생연도가 같으면서도 경남 정신의 상징이 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의 탄신 500주년 기념 사업 역시 경남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합천.산청 경쟁적으로 투자=선생의 출생지인 합천은 8억원을 들여 생가를 복원키로 했으며, 산청은 20억원을 들여 기념관.교육관을 세우기로 했다. 경남도청은 '남명정신 경남정신'이라는 기치 아래 해당 시군청의 각종 기념.복원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또 '남명선생 선양위원회'(합천)는 생가, 계부당, 용암서원 등을 한 곳에 모아 '남명공원'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선생의 출생지이면서도 합천에는 뇌룡정(삼가면) 외에는 아무런 유적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 그 외 선생의 유적 중 남아 있는 것은 김해의 신산서원.산해정, 산청의 산천재.덕천서원 등뿐이다.
학계도 올해는 특히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오래 전부터 경상대(진주) 남명학연구소, 남명학연구원 등이 남명학을 연구해 왔고, 근래에는 전국의 각 대학으로까지 확산돼 일반화됐다. 근래 들어서는 심포지엄.논문.연구서 등이 쏟아지고 있다.
◇일부 무리도=합천군청이 뇌룡정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남명로'로 지정하려 서두르고 있으나, 정작 도로는 엉망이어서 전시행정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지정 대상은 제2삼가교(일부리)~학리~뇌룡정~대의면(의령군)을 잇는 약 9.5㎞로, 지정한 후 1천만원을 들여 유적 안내 표지판을 설치키로 한 것.
그러나 그 중 3.1㎞는 도로가 좁고 포장도 안돼 있을 뿐 아니라, 새마을사업으로 만든 토동잠수교는 낡고 가라 앉아 올해 초부터 교통까지 통제되고 있어 버스는 1.2㎞를 둘러다니는 실정이다.
남명 선생 선양위원회 박우근(56) 위원장은 "길은 제대로 안닦고 안내판만 세우면 뭣 하느냐?"며, "외지인에게 오히려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한다"고 했다. 주민 김모(42)씨도 "거창한 안내판만 세우면 남명로가 되느냐?"고 했다.
군청 관계자는 "하천 기본계획을 수립하긴 했으나 10여억원의 자금이 필요해 엄두를 못내고 있다"고 했다.
◇남명의 연고지=선생은 대체로 합천(유년기)-서울(청소년기)-김해(청년기)-합천(장년기)-산청(노년기) 등을 옮겨가며 산 것으로 정리돼 있다.
연산군 7년 음력 6월26일(올해는 8월15일)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있던 외가에서 태어나 5세 때까지 살았다. 그 뒤 서울로 올라 간 계기는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의 문과 급제. 그러나 26세 때 부친이 별세하자 합천 삼가로 돌아왔다.
시묘살이를 마친 뒤인 28세 때 의령의 자굴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던 김해 신어산 밑 탄동으로 이주,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48세 때까지 18년간 머물렀다.
그러나 48세 때 다시 합천으로 돌아 와 10여년간 삼가면 토동에 계부당(鷄伏堂) 뇌룡정(雷龍亭) 등을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이 교육 시대를 흔히 '뇌룡정 시대'라 부른다. 선생의 기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민암부'(民巖賦)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일명 丹城蔬)도 여기서 나왔다. 61세가 되자 지리산 밑 산청군 시천면 덕산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거주했다.
◇남명의 사상.정신='민암부'는 백성을 물에 비유, 물이 노하면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고 말함으로써 민중 중심의 사상을 드러냈다. 을묘사직소는 당시의 상황을 "벌레가 백년 동안이나 속을 갉아먹어 수액이 말라 곧 쓰러지게 된 큰 나무"라고 대담하게 파악했으며, 대비 문정왕후를 "궁궐 안의 늙은 과부", 임금인 명종을 "선왕의 고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직설했다.
유학의 근본 정신은 흔히 경(敬.조심스러움)과 의(義.행동)로 정리되고 모든 대가들이 이 둘을 겸했지만, 위의 직설로 봐 남명은 의를 아주 소중히 했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런 직설적 특징이 경남 기질과 닮은 것 아닌가 보는 학자들이 적잖다.
반면 지나치게 경을 강조하다 보면 행동력이 상실돼 까딱 행동(의)은 없이 지나치게 자기 이익 보호적인 음험한 성격으로 변질될 소지가 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남명은 2개의 칼을 '경의검'(敬義劍)이라 이름 붙여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경은 안을 밝히고 의는 밖으로 결단한다)라 새겨 학문의 표상으로 삼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란 의병으로 열매=선생이 퇴계보다 2년 더 살다 72살세(1572, 선조 5년)에 세상을 떠난 뒤 만 20년만에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의 정신은 영남의 의병으로 꽃피었다.
부산 등 경상좌도가 처참하게 유린되고 관군이 패퇴하자 정인홍.곽제우.김면 등 3대 의병장과 많은 제자들은 합천.의령.고령 등 영남우도에서 창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왜병의 곡창지대 호남 진출을 저지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그 많은 의병이 나온 것은 바로 의를 의로써 실천한 그의 정신에 영향받은 것으로 학계는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
합천.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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