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옛 그림에 깃든 마음

입력 2001-06-02 14:58:00

옛 그림에 역원근법(逆遠近法)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원근법과는 반대로 앞이 좁고 오히려 뒤가 넓어지는 투시법이다. 세상을 보면 원근법이 옳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데, 우리 조상들은 어째서 이토록 불합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그것도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조선말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1,500년 유구한 세월 동안 변함이 없었으니 여기엔 무언가 깊은 속뜻이 있지 않을까?

원근법에선 뒤로 갈수록 점차 좁아져 결국엔 한 점으로 모인다. 이것이 소실점(消失點)인데, 소실점은 보는 이의 눈 위치와 정확히 일치된다. 서양의 원근법은 대단히 과학적이다. 하지만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개인적인 시각이기도 하다. 사람 하나 없는 풍경화를 본다고 하자. 그래도 그림 바깥에는 여전히 소실점 위치에 서서 차갑게 풍경을 관찰하는 화가의 이성적 눈빛이 느껴진다.

자기중심적 사고 판치는 세상

과학적, 이성적인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궁중의 잔치 장면을 그린 작품을 생각해 보자. 원근법에 의하면 제일 아래 있는 악공들이 가장 크고 다음 중간에 앉은 신하들 모습이 크고 저 안쪽 깊숙이 자리잡은 왕은 형체가 보일 듯 말 듯 초라해진다. 하지만 역원근법에선 왕이 가장 커지고 악공이 작아진다. 역원근법은 혹시 지배층을 강조하기 위해 발명된 것일까?

아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하찮은 부엌 또한 그렇게 그린다. 부엌 그림에서는 집의 모습이 뒤로 가면서 넓어지니까 뒤쪽에 놓인 물건도 앞의 물건에 가리지 않고 하나하나 고루 잘 보이게 된다. 아, 그럼 여러 사물이 모두 잘 보이라고 역원근법을 썼을까? 하기는 화가의 마음속에 저 뒤편에 놓인 물건들도 시야에 가리지 않고 잘 보였으면 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럼 이번엔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자. 서안(書案)을 앞에 두고 단정히 앉은 선비 그림에서도 앉은뱅이 책상은 역시 앞이 짧고 뒤가 넓다. 원근법대로 그려도 이 그림에선 별반 가려질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했을까? 초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 속의 주인공이다. 그 인물을 중심에 두고 존중하다 보니 그 분 방향에서 본 서안 모양을 그대로 그려 놓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학.이성의 이름으로 미화

하지만 옛 화가들이 대상을 존중하던 마음은 비단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정선(鄭敾)이 그린 가없는 동해 바다 그림을 보면 일렁이는 파도는 놀랍게도 수평선을 향해 뒤로 물러설수록 더욱 커진다. 그래서 보는 이가 작품을 대할 때 집채만한 파도가 자신을 덮쳐오는 듯한 감동을 준다. 그렇다. 이 그림에선 진정한 주인공이 그림 속 유람객이 아니라 만물을 기르고 키워주는 거대한 생명체, 바다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 가져야

티브이(TV)에서 피아노 연주 장면을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건반 앞이 좁고 뒤가 넓은 역원근법 화면이었던 것이다. 실제론 건반이 이렇게 보일 수 없다. 전문가에게 물었다. "어떻게 찍었기에 건반의 뒤쪽이 넓게 보입니까?" 대답은 단순했다. "어안렌즈를 써야지요". 그렇다! 음악가의 심오한 예술 세계에 보는 이가 몰입되도록, 현장의 빨려들 듯한 연주실황을 실감나게 전하기 위해서 카메라맨은 애써 렌즈를 갈아 끼워 역원근법의 화면을 연출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조상들이 역원근법을 쓴 까닭을 알 듯하다. 중요한 것은 보는 내가 아니라 그려진 대상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깊이 이해하기 위한 마음자리에서 역원근법이 탄생한 것이다. 그 상대가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연이든 간에 정다운 마음씀씀이는 변함없고 한결같았다. 오늘 우리는 과학이니 이성이니 능률이니 하는 미명하에 너무 원근법적으로, 인간 중심적으로만 살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새만금의 너른 갯벌이 눈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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