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흔들리는 성

입력 2001-05-26 00:00:00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 뿌리의식이 강하다고 한다.특히 유림의 고장인 대구.경북지방의 씨족관념은 유별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하면 관향(貫鄕)을 들먹이고 조상의 내력을 훤히 꿰뚫으며 저마다 충효의절(忠孝義節)의 가문 자랑에 열을 올리게 마련이다. 그만큼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기 때문이리라.

예부터 '동거지팔촌(同居之八寸)이라는 말이 있듯이 팔촌까지 한 울타리에서 산다는 뜻으로 아직도 시골 곳곳에는 타성받이보다 일가친척끼리 오순도순 모여 사는 집성촌이 많다. 이같은 집성촌은 어쩌면 그곳에 터 잡은 입향조(入鄕祖) 이래 수백년 대물려 온 강력한 뿌리의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춘추향사 때는 전국에 흩어져 살던 종친들이 관광버스까지 대절하여 선영을 찾아 한 핏줄의 족세(族勢)를 과시하고 조상의 얼과 유적을 되새기며 혈연을 다지는 인본지심(人本之心)을 미풍양속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친양자 조항' 여성계.유림간 논란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과년(過年)한 자녀의 혼사를 앞둔 집안에서는 "자기들끼리 정 붙이고 살면 그만이지…"라는 말이 하기좋은 소리일 뿐 사실상 결혼의 조건충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양가 부모 사이에는 으레 당사자의 궁합을 보는 것은 물론 상대방의 집안 내력을 꼼꼼이 살펴보고 과연 걸맞은 사돈으로 맺어질 수 있을 지를 가름해 보는 것이 중요한 절차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가족사에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러한 풍습 역시 강한 뿌리의식에서 나온 가풍(家風)이자 전통이 아닐까.

재혼여성 늘어나는 사회분위기 영향

흔히들 막역한 친구 사이에도 시시비비를 가릴 때면 우스갯소리로 "그게 사실이 아니면 차라리 내가 성(姓)을 갈지"라는 말을 예사롭게 내뱉는다. 성을 간다는 것이 조상을 욕되게 하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만큼 어렵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에서는 국회에 계류중인 민법개정안 가운데 '친양자(親養子) 조항'을 관철시키겠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친양자 조항'이란 재혼한 여성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의 성을 새 남편의 성으로 바꾸도록 법적으로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이 민법 개정안은 그동안 여성계와 유림이 첨예하게 대립한 동성동본 금혼조항과 함께 논란이 많아 벌써 3년째 처리되지 않고 표류중에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법 개정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 이 법은 우리의 전통적인 씨족관념을 뿌리째 흔들어 놓을 위험소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림이 적극 반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 법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김씨 성을 가진 아이가 하루 아침에 이씨나 박씨인 새 아버지의 성을 따라 마음대로 성을 바꾸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이른바 '새 엄마' '새 아빠'의 가족구성이 이뤄지면서 혈통의 세계(世系)가 무너지는 세태가 올 것이다.

전통적 씨족관념 붕괴 우려

현재 새 아버지와 성이 다른 미성년 자녀를 두고 있는 재혼여성이 최소한 16만명에 이른다는 잠정수치가 나와있다. 게다가 작년 한해 동안만도 세쌍 혼인에 한쌍이 갈라서는 이혼율이 급증하면서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간 아이들이 새 아버지와 성이 달라 정서적으로 갈등을 느끼며 많은 고통을 삼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자라서 장차 성년이 되었을 때 핏줄이 켕겨 자신의 친아버지를 찾는다면 그것 또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아무리 부부는 돌아누우면 남이라지만 이젠 돌아눕고도 자녀들의 성까지 바꿔야 한다니 그것이 두려운 세월이다.

이용우(저널리스트, '혼돈의 세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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