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동창회 이상열기

입력 2001-05-17 00:00:00

5월은 초등학교 동창생이 만나는 달? 전국적으로 초교 동창회 회오리가 휩쓸고 있다. 지난 주말이 피크. 큰길 가나 학교 주변에는 이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물결을 이뤘었다. 이때문에 주말을 보낸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30~40년만에 다시 만난 코흘리개 친구 얘기를 주고 받느라 '월요일은 일 안되는 날'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왜 이럴까?

◇친구 찾아 전국으로=포항공단 포스코개발 박문주(50) 부장은 지난 주말 고향인 부산 기장군을 다녀왔다. 목적은 초교 동창회 참석. 머리가 희끗해진 여자 동창에게 말을 놓아야 하나 높여야 하나 한참 고민. 그러나 "이내 40여년 전으로 돌아 가 원 없이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고 즐거워했다.

포항 용흥동 김선희(39.여)씨는 지난 주말 부산의 심야극장에서 초교 동창생들과 함께 '친구'라는 영화를 봤다. 모임 이름은 '심야 동창회'. 인천제철 박종규(43) 차장은 오는 25일 있을 대구 내당초교 동기모임 통보를 받고 지금 한껏 들떠 있다. 짱꾸.꼬꼬.정부미.항아리 등 몇몇의 별명부터 먼저 떠올렸다. 박 차장의 동기들 중 일부는 지난 13일 충북 영동으로 봄소풍을 다녀왔다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었다.

◇왜 초교 동창일까?=선거 관련 등 목적이 엄연하거나, 빈부.학력 격차로 인한 파당이 생기는 중고교 동창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하기 때문이라고 참가자들은설명했다. 포항 용흥동 이문균(40)씨는 "코 찔찔이 시절부터 다 아는 사이여서 꾸미고 숨길 필요가 없으니 편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초교 동창은 거의가 동네 친구들이기도 해 객지 생활하다 만나면 그것만으로도 고향에 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도 했다.

이씨는 "이때문에 몇년 전까지 열성을 바쳤던 고교 동창회는 어느 정도 열기가 식었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최고 인기 모임이었던 고교 동창회가 어느새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경북대 사회학과 노진철 교수는 이런 현상을 일종의 '현실 도피'로 풀이했다. 현재의 40∼50대는 한국 산업화를 주도하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반을 잡았으나, IMF사태 이후 조기 퇴출되면서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은 세대라는 것. 이 과정에서사회적 역할을 상실하자 심리적 안식처로 초교 동창회를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순수한 또래 집단이며, 경쟁, 위계질서, 서열 등에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기 때문.

계명대 사회학과 이종오 교수는 "어려운 현실과 장래 전망이 불투명할 때 나타나는 과거 회귀일 것"이라고 관측했다.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향수, 영화 '친구'의 히트 등도 같은 현상이라고 풀이하고, "현실에 대한 불안.좌절감이 과거를 이상적으로 생각케 만든다"고 진단했다.

◇장년층 새 또래문화 태동=초교 동창들의 만남은 졸업 시기와 도농(都農) 등 출신지역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이 벌이는 운동회에서는 오자미 던지기, 대형 지구본 돌리기, 줄다리기 등 옛날 그때의 '오리지널 운동회'가 되살아 난다. 뒷풀이 노래방에서는 남녀 동기들이 '고향의 봄'이나 교가를 불러 향수를 함께 한다. 소풍도 빼놓을 수 없는 재밋거리. 지난 5일 경북 거주 초교 동창들과 봄소풍을 다녀 왔다는 강원도 태백 출신의 안경자(45.여)씨는 "죽 둘러 앉아 김밥.주먹밥을 나눠 먹으니 30여년 전이 되살아 나더라"고 했다.

동행하는 자녀나 손주들에 대해 전통잇기 혹은 세대차 극복 효과를 기대하는 마음도 엿보였다. 지난 13일 동창 체육대회에 참가했다는 박정환(51, 경기도 여주초교출신)씨는 "자녀들에게 부모의 어릴 적 한때를 보여줄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각자의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간혹 눈에 띈다. 농어촌 등 시골 출신들은 옛날 향수를 더듬으며 모교를 방문하거나 야외로 나가는 반면, 도시 출신들은 함께 모여 영화.연극을 관람하거나 노래교실에서 공동수강하기도 하는 것.

◇간혹 물의, 그러나 더 건전한 활동=동창회 인터넷을 들여다 보면, 동창 모임이 마냥 즐겁고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 관계의 문제도 불거지는 것.

초교 동기회를 이끌고 있다는 포항의 이모(45.용흥동)씨는 "중고교와 달리 초교 동창회에는 남녀가 섞여 있어 불미스런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따라서개인적 만남은 자제토록 충고했다. 또 의기 투합했다가 보증.동업 등의 후유증을 겪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잦은 선거에 이용되는 것을 경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바람직한 결과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앞의 김선희씨 동창들 경우 월 2만원씩 회비를 거둬 모교 결식 후배들을 돕고 있다. 경주의 이태영(40.성건동)씨 모임은 모교 소년소녀 가장 1명을 대학까지 후원키로 했다.

또 일부에서는 자녀들 끼리 만나게 해 부모간 친구관계를 자녀까지로 확대시키기도 하고, 헌옷 돌려입기 등 '동창간 아나바다 운동'도 활성화되고 있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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