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상화탄생 100돌 봄은 왔는가…(4)상화가 만든 교남학교 권투부

입력 2001-05-12 15:28:00

중국에 가서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고 돌아온 후 상화는 그 행보가 적잖게 달라졌다 . 가까운 친구들의 눈에도 여러가지 심경의 변화들이 감지됐다. 우선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더욱 과묵해졌으며 독서와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20년간 그리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던 부인 서씨의 미덕을 헤아리고 경애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일년간 대륙의 남북 각지를 돌아보고 느낀 감화가 남달랐던지 상화는 이후 교육·문화사업에 정열을 쏟기 시작했다. 1936년 이후 3~4년간을 교남(嶠南)학교(대륜중고)의 무보수 영어·작문 강사로 나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학생들 가르치기에 열성이던 상화는 당시 교남학교의 교정경기(校定競技)중에 권투를 추가할 것을 강력히 제안했다. 그때 학교의 다른 직원들은 권투가 잔인한 운동으로 중등학교의 경기 종목으로는 부적당하다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상화는 결코 뜻을 굽히지 않고 기어이 뜻을 관철했다.

그런데 상화가 권투부를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걸작이었다.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 지금껏 경북 권투계에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교남학교 권투부. 그것이 경북(대구) 권투의 효시였다. 상화는 방과후 학생들의 각종 경기와 운동코치 역할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1981년에 발간된 '대륜(大倫) 60년사'는 이 부분을 "1936년 선생은 자진하여 무보수로 본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며 민족정신 민족사상을 일깨웠고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민족시인으로서 선생의 울분의 일단은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주장아래 본교에 권투부의 창설을 가져오기도 했다"라고 적고 있다.

또 같은 책 체육활동편에는 "권투는 탁구와 더불어 당시 교남 2대 교기로… 북편 1학년 교실 옆 방을 산실로 하여 창설되었다. 영남의 중등학교에서 권투부의 창설은 본교가 효시이며, 영남 권투계의 선구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대륜중고 교지는 이어 영남과 전국대회를 쟁패한 선수로 배중민·신구실·이종식·한경동 등을 들며, 특히 "신구실(申玖實)은 졸업후 일본 전수대학에 진학해 전일본학생선발전에서 우승하였다"고 당시의 활약상을 전한다.

이 부분에 대해 김해동(63·안동시 와룡면) 경북복싱연맹 고문은 "1950년대 경북대표로 전국체전 등에 출전하며 당시 복싱연맹 이사로 있던 신구실씨를 자주 만났다"며 결국 교남학교 권투부가 경북복싱연맹의 맹아였음을 증언했다.

교남학교 졸업생 김동춘(82·시인)옹도 "2학년 때 체육지도를 맡았던 김준기 교사(6대 교장)로부터 상화 선생의 주장으로 권투부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1년간 권투부 생활을 하기도 했던 김옹은 자신이 선수생활을 할 당시에는 권투부 학생이 5, 6명 정도였다며 신구실 선수는 2년 선배로 해방후 교남학교 졸업생 동창회인 태백구락부에서 가끔씩 만났다고 기억한다.

사실 상화의 가계는 원래 체육활동과 적잖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상화 자신이 15세에 서울의 중앙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운동에 탁월한 소질을 보여 한때 야구선수로 활약했으며, 아우 상백 또한 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한국체육계의 태두였다. ('근대 대구·경북 49인'·김도형외 지음·혜안·1999).

상화의 친구 백기만 시인도 '상화와 고월'이란 저서에서 "상화는 학교성적이 우수했고 야구에도 기능이 있어 중앙학교의 명선수로 위명을 날린 때도 있었다"고 적고있다.

권투부는 상화가 학교를 그만 둔 1940년을 전후해 없어지게 됐다. 이성수 전 대륜고 교장(74)은 "교사를 수성동(현재 신세계타운)으로 옮긴 뒤인 1942년 대륜학교 시절 입학 때는 권투부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 볼수 없었다"며 "교남학교가 한동안 '주먹잡이 학교'가 됐다는 세간의 비난 등으로 권투부가 폐지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상화는 왜 권투부 창설을 그렇게 강권했을까. '빼앗긴 들'과 '잃어버린 봄'에 대한 회한이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울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조국, 상실감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울분, 그리고 타는 목마름. 상화의 권투부 창설은 3·8 대구만세시위 주도와 'ㄱ당사건'으로 대변되는 그의 항일투쟁의 명맥을 잇는 한가닥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조향래기자 swordjo@imaeil.com

도움주신 분=김해동 경북복싱연맹 고문·대구복싱연맹·경북복싱연맹·김동춘 시인·이성수 전대륜고 교장·대륜고(대륜60년사)·'근대 대구경북 49인'(김도형외 지음)·'상화와 고월'(백기만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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