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보 동상이 나타나고 5,6,70층 빌딩들이 한 덩어리의 고산준령(高山峻嶺)처럼 같이 이어져 있으니 몇 동이 있어야 크고 웅장해 보이지 너무 수가 많으니 아득하고 황당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마천루 거리에서 유료 주차장에 차를 맡기고 거리에 나가서니 마전(麻田)에 들어간 달팽이처럼 나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진다…'. ('소정유기(素亭遊記)' 중 미국동부기행)
시어머니가 글을 쓰고, 며느리가 컴퓨터 워드로 치고, 시아버지와 외손녀가 그린 그림이 삽화로 들어가 있는 책이라면 어떠할까.
경북 영천 출신인 올해 칠순의 이휘(李輝·서울시 송파구 오금동) 할머니. 얼마전 대구에 사는 큰 아들내외로부터 평생 잊을 수 없는 멋진 선물을 받았다. 10년전부터 몇차례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틈틈이 써두었던 자신의 글들이 아담한 책으로 엮어져 나온 것이다. 큰 며느리가 컴퓨터 워드를 치고 남편과 외손녀, 그리고 자신이 여행당시 그렸던 그림들이 삽화로 들어간 책 '소정유기(素亭遊記)'(비매품). 비록 간소한 책이지만 그에겐 세상의 어떤 책보다도 귀하게 느껴진다.
'무정세월 약류파(若流波:흐르는 물같고)라 부생약몽인생(浮生若夢人生:꿈 같은 인생)살이 천리타향 전전하며 어언 환갑도 지난 나이에 우연한 계기로서 북미대륙 동부지역을 여행하게 되니…' 로 시작되는 기행일기의 서두 말미에 이씨는 '50여 성상(星霜) 동거동락하면서 인생여로를 별 탈없이 함께 해왔기에 (남편의) 희수(喜壽:77세)기념으로 이 책을 드릴까 합니다(여유(旅遊:여행)할 수 없는 후일에 가서 추억으로 보기 위하여)'라고 적어 평생의 반려자에 대한 애틋한 정을 나타냈다.
모두 183쪽, 사륙배판 변형 크기의 책은 모두 4편의 여행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1991년 미국에 유학가 있던 둘째 딸 내외집을 부부가 함께 찾아갔을때의 미국여행담을 기록한 '미국동부 기행', 그 이듬해 중국내 독립운동 유적탐방 여행을 쓴 '중국 기행', 94년의 '일본국 구주지방 기행', 98년의 '미국서부 기행' 등.
이국의 풍물과 사람들, 생활상 등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순진한 호기심과 감동, 다짐 등이 긴 호흡의 옛스런 문체로 꾸밈없이 표현돼 있다. 특별한 학력없이 살림만 살아온 평범한 할머니의 글이라기엔 놀랄만큼 한문구사력이 풍부하고 역사에 대한 지식도 깊다.
알고보니 이씨는 영천의 유명한 유학자인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수준급의 한문실력을 갖추게된데다 이전부터 틈틈이 가사(歌辭)를 지어왔다는 것. 국문학 전공 대학원 학생들이 할머니의 가사를 자료로 논문을 쓰기도 했고, 지역 대학의 한 교수는 할머니의 가사에 주석을 다는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할머니는 또 서예, 사군자 취미도 있어 책 제목의 소정(素亭)은 바로 자신의 호(號)에서 딴 것.
큰며느리 김병숙(50·계명대 강사)씨는 "다섯자녀들의 뒷바라지와 가정만을 위해 헌신해오신 어머님께서 10년전 몇 권의 낡은 공책을 내어놓으셨는데 거기 쓰여진 가사들이 어찌나 구절구절 섬세하고 진솔한지 놀라웠다"고 말했다.
몇년 후 자녀들의 격려에 힘입어 그간의 가사들을 손수 붓으로 다시 써서 복사, '소정가사(素亭歌辭)'라는 이름으로 묶어낸 적도 있다.
이번의 '소정유기'도 시어머니의 기행문 메모를 본 김병숙씨가 "우리만 보기엔 아깝다"고 여겨 책으로 엮어내게 됐다. 150권을 만들어 가족들과 주변 친지들,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는데 모두들 재미있다는 반응.
"신학문을 별로 접하지도 못했고 나이 열아홉에 시집와 다섯 자식들과 손자들 키우느라 그동안은 글 쓸 생각도 못했었다"는 이휘 할머니는 "남편과 두 식구가 되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내의 글에 삽화를 그려 넣어준 남편 서상교 할아버지도 "처음엔 아내더러 그런 귀신같은 것 뭐하러 쓰느냐고 핀잔도 주었는데 가만히 보니 글 쓰는 것이 멋도 있고 늙어서 취미를 학문에 두는 것이 보기에도 좋다"고 한껏 격려했다.
오는 9일, 모교인 대구상고를 찾는 남편과 함께 대구의 아들집에 올 예정인 이 할머니는 '소정유기'에 이어 대구의 한 국문학 전공 교수가 주석을 단 자신의 가사집을 곧 출간하게 된다.
류승완기자 ryusw@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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