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식 수업 좋은줄은 아는데...

입력 2001-04-20 00:00:00

지난 17일 오후3시. 대구 정화여고 1, 2학년 교실 복도는 박수 소리, 까르르 웃는 소리로 가득했다. 주간 생활 목표나 실천사항 등을 토의하는 학급회 시간이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그런 것 같잖았다.

◈"경상도 사람 말못한다 요즘 학생은 안그래요"

◇열기 띤 시도들= 가만히 교실 뒷문을 열어 봤다. 책.걸상 배치부터 달라져 있었다. 학생들이 반씩 나뉘어 양쪽에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칠판에는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적혀 있었다. 학생들은 돌아가며 열띠게 발표하고 있었다.

인터넷 자료까지 내 보여 가며 주장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학생이 있었다. 준비해 온 내용을 책 읽듯 하는 경우도 있었다. 발표 자료를 든 오른 손은 그렇다치고, 하나 남은 왼손을 둘 바 몰라 머리를 만지다 책상을 짚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학생도 눈에 띄었다. "음, 음, 그러니까… 음, 음". 발표보다 더듬는 데 시간을 더 많이 들이는 학생도 보였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을 인정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역사 왜곡이지만, 우리나라도 일본 입장이었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고 봅니다"… 그래도 박수는 쏟아졌다. 의견이 다르다고 남의 주장을 배척하는, 토론 태도 자체가 안돼 있는 기성 세대가 보기엔 야릇한 풍경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이 발표.토론 능력에선 떨어진다는 얘기가 있지만, 요즘 학생들에게 맞지 않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준 주제인데도 잘 준비해 토론을 진행하고 있잖습니까?". 최옥선 담임교사가 알려줬다.

정화여고는 올해 중점 과제로 '토론수업 활성화'를 잡았다. 매달 한가지의 토론 주제를 설정, 독서, 신문 스크랩,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시간, 발표.토론하는 시간, 주제에 대해 글쓰기하는 시간 등으로 구성했다. 다음달에는 '유전자 변형 식품', 6월에는 '사형제도', 7월에는 '인간 복제' 등의 주제가 내정돼 있었다.

◈교실수업 개선 모델 평가 현장선 제약많아 기우뚱

◇극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 토론수업은 최근 몇 년 사이 교실수업 개선을 위한 좋은 모델로 번져 나가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선 제약이 많아 활성화하기 쉽잖다고 했다. 교사들의 의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대로 하기엔 교사의 부담이 너무 크다. 골고루 발표.토론할 기회를 주기에는 학급당 인원이 너무 많아 담당 교사가 많은 준비를 해야 하고 운용 기술도 뛰어나야 한다. 다른 강의를 하면서 이같이 힘드는 토론수업을 지속적으로 병행해 나가기가 쉽잖다.

둘째, 할당된 시간에 한계가 있다. 45~50분만에 주어진 주제를 충분히 토론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때문에 다른 수업의 시간표를 조정하는 교사들도 있다. 두시간씩 토론을 이어가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

셋째, 강의식 수업에 익숙해져 토론수업을 그다지 중요치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교육계에 우세하다. 이것이 무엇보다 큰 문제이다. 학생들은 여러 과목의 이런저런 과제에 쫓기고, 학원 가기에도 바쁘다. 그때문에 별 실익도 없어 보이는 토론수업은 일종의 사치로 치부돼 버린다.

◈학생들 필수적 성장과정 학교서 '토론의 장'열어야

◇무엇이 필요한가?= "기회만 주면 학생들은 발표하고 토론하기를 즐기고, 그럴 능력도 있습니다". 전교조 대구지부 임전수 정책실장은 보다 원론적인 것에 대한 인식부터 바로 세우자고 했다. 학교에서조차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것. 그러나 그것은 어른들이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얘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더욱이 토론은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성장 과정이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정리하는 능력과 기회를 주는 데다, 다른 사람의 다양한 견해를 듣고 배려하는 자세까지 키워주기 때문.

그렇다면 상황은 명확히 정리된다. "토론은 매우 중요한 성장 과정인데도 학교는 그걸 소홀히 하고 있다". 중요성에 주목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아직은 교사 개개인 차원이라고 현장 교사들은 말했다. 교육 당국의 연구 자료나 프로그램 개발도 취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 우리 교육이 바로 세울 과제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