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최종진-논설위원)

입력 2001-04-19 15:01:00

세계 여러나라중 그런대로 잘살거나 강대국(强大國)은 신문의 역사가 200년안팎의 국가다. 영국.프랑스.독일.에스파니아.미국이 그렇다. 가깝게는 일본이나 중국도 이 범주에 속한다. 신문역사가 짧은 나라가 아무리 라디오.TV 등 전파매체의 활동이 활발하다고 해도 국민소득과 국제외교무대에서 영향력도 이들 나라에 비교하면 뒤처진다는 게 언론학자들의 분석이다. 이유는 언론과 권력간의 적절한 균형관계에 있다고 본다. 신문의 역사가 오래된 대부분의 국가는 올바른 여론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판기능이 위축되지 않고 국민들의 의식도 권력자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감시의 눈을 감지않아 국가의 정체성 확립과 발전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간동안 획득한 언론의 자유는 권력과의 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런 기반은 무너질수도 없다.

우리나라는 지금 신문과 권력, 신문과 방송, 신문끼리의 갈등이 어느때보다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고시 부활과 관련해 방송은 정부의 정책에 순응하는 인상이고 중앙의 동아일보.조선일보.중앙일보 등은 한사코 정부에 놀아나는 것이 아니냐며 반격하고 나서 끝간데 없는 신문과 방송의 대결구도 관계라는 우려도 있다. 신문고시 결정 이후 KBS갡BC는 이를 집중 보도하고 일부 신문은 방송보도의 공정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정부는 신문고시 부활(復活)을 언론개혁의 일환으로 주장한다. 이에 맞서는 신문사의 목소리는 '신(新) 언론 통제'다.

이 참에 왜 정부가 문제의 제기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없는지 우리는 이해가 안간다.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들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신문고시 운영 방안에까지 제동을 걸고 나선 형편이다. 규제개혁위원회 민간 위원들은 신문고시 부활안을 통과시킨 것은 신문협회의 자율을 존중한다는 공정위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공정위의 약속위반이라는 적시다. 일부 민간위원은 고시를 재심의 할 수 있다는 입장도 내놓아 공정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일부 단체에선 신문고시 자체가 위헌(違憲)이거나 위헌적 소지가 많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런 반론이 왜 계속 잇따르고 있는지 정부는 되돌아 볼 일이다.

우리 신문의 역사는 권력에 의한 신문통제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신문에서부터시작된 재갈물리기는 광복 이후에도 경향신문이 권력의 압력으로 폐간되기도 했다. 자유당시대는 직접적인 탄압이 특징이다. 물리적인 행사도 한 정권으로 보면 된다. 매일신문에 행한 백주테러가 대표적인 사례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는 '기술적인 언론탄압'의 단초를 연 정부로 분석한다. 언론종사자에게 내민 국회의원, 유신국회의원이라는 '당근'을 받아 먹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 양 대통령은 '언론 폭압(暴壓)'의 동지(同志)라는 인식이 강하다. 어디 그 시절, 반반한 비판성 기사가 어느 신문에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방송은 '땡전 뉴스'가 있을 정도 였으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 그때 생각하면 언론계 종사자들은 할말을 잃는다. 자괴감(自愧感)을 떨치지 못한다.

부끄러운 건 또 있다. 우리 신문의 역사가 100년을 넘어서도 반반한 엘리트 신문 하나 없다는 점이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기사 등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한 종합지(綜合紙)는 있어도 세계가 수긍하는 비판과 해설, 논리를 전개하는 신문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발행부수(發行部數) 수백만부라는 '외형거대(外形巨大)'신문만 있을 뿐이다. 단순하게 경파(硬派)기사 위주로 지면을 채울 수밖에 없는 우리 신문계의 풍토는 '정보수출국가'에로의 발돋움은 아무래도 늦잡쳐 질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발행부수가 20만~30만부 정도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의 엘리트 신문을 한결같이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언론환경 개선의 몫은 일차적으로 언론계에 있지만 권력당국도 성찰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신문고시가 과연 국민들로부터 동의를 받고 있는지, 살펴 보기를 권한다. 공영방송고시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제나 정권은 유한(有限)한 것이고 언론기록은 언제나 남는 영속성(永續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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