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해교수가 새로 본 신명과 해방의 노래 '우리민요'

입력 2001-04-09 14:29:00

◈(15)아이들의 말놀이로 부르는 나무노래

'산산산 나무나무나무' 우리 산과 나무를 잘도 노래했다. 산은 봄꽃이 화사하게 물들이다가 마침내 나무가 푸른 물을 들인다. 찔레나무와 버드나무가 촉을 틔우기 시작하면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잇따라 잎을 피워 산을 푸르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대부분 '이름 모를' 나무들이지만 시골 어른들은 그 이름을 휑하니 꿰고 있다. 나무노래는 어른들의 이런 역량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정주영 회장이 타계하자 재계 거목이 쓰러졌다고 언론은 호들갑을 떤다. 거목만 나무가 아니라 소목도 나무이며, 작은 나무들도 제각기 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무노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른들이 어릴 때 말놀이 삼아 불렀던 노래인데, 나무이름의 소리나 뜻에 따라 말풀이를 하면서 나무이름들을 줄줄이 읊조린다.

가자가자 감나무야 / 오자오자 옻나무야

물에 빠진 뽕나무야 / 인자 본께 참나무다

나무노래의 들머리에 흔히 등장하는 것이 감나무와 옻나무이다. 나무이름의 첫말을 따서 '가자가자 감나무 오자오자 옻나무'로 이름풀이를 한 것이다. 뽕나무와 참나무는 좀 다르게 풀었다. 물에 빠지는 '퐁당' 소리의 앞소리를 따서 '뽕나무'를 풀이하고, 정신을 차려서 다시 보니까 이제서야 나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으로 '참나무' 곧 참 나무로 풀이를 한다.

나무이름 풀이를 하는 나무노래는 끝이 없다. 줄거리도 없고 순서도 없다. 나무의 속성이나 이름의 뜻을 잡아서 풀이를 하는데, 2음보 4.4 조를 기본으로 4.3조 또는 4.5조의 변형이 있다. 그것은 나무이름이 3 자나 5 자로 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너와 나와 살구나무 / 십리 절반 오리나무

하날 중천 구름나무 / 달 가운데 계수나무

구십 구에 백자나무 / 열 아홉에 스무나무

마흔 아홉 쉬인나무 / 처녀 애기 자장나무

따끔따끔 가시나무 / 밑구녁에 쑥나무

한결같이 4자로 나무이름을 풀이하되, 그 풀이방식은 몇 가지 유형을 이루고 있다. '너와 나와 살구나무'는 너와 나와 더불어 산다는 문장을 이루도록 풀이를 했다. 따라서 이것은 나무이름을 그 자체로 풀이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무이름 '살구'라는 말을 넣어서 짧은 글을 지은 셈이다.

이와 같은 형식을 이루는 것이 '처녀 애기 자장(자작)나무' '밑구녁에 쑥나무' 등이다. 처녀 애기는 곧 처녀의 애기, 처녀가 낳은 애기를 뜻하는 말이다. 처녀가 낳은 애기는 숨겨야 한다. 따라서 애기를 잠재우기 위한 노력으로 '자장자장'하며 자장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밑구녁에 쑥나무'도 흥미롭다. 이때 '쑥'은 의태어다. 무엇을 '쑥' 낳거나 깊이 '쑥' 밀어 넣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밑구녁은 항문일수도 있고 여성의 자궁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뒷간에서 항문으로 뒤가 '쑥' 빠지는 상황일 수도 있고, 남녀의 성행위를 떠올리며 여성의 자궁에다 남성 성기를 '쑥' 밀어넣는 상황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일까. '밑구녁으로'가 아니라 '밑구녁에'라고 한 걸 보면 뒤의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빵구 뽕뽕 뽕나무 / 물에 둥둥 똥나무

바람 솔솔 솔나무 / 방구 살살 싸리나무

나무이름의 첫음절을 반복하는 풀이 방식을 취한 것이다. 풀이말의 중복 음절에 맞추다 보니 소나무도 솔나무가 되었고 돈나무도 똥나무가 되었다. 소나무는 솔이라고 할 뿐 솔나무라고 하는 일은 없지만, 돈나무는 원래 똥나무라고 하였으므로 오히려 자연스럽다. 돈나무는 돈과 무관하며 이 이름이 처음 지어진 제주도에서는 본디부터 '똥낭' 곧 똥나무라고 일컬었다. 꽃이 지고 난 가을 이후에도 열매에는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묻어 있어 항시 파리가 들끓었으므로 '똥낭기'라 불렀다. 그런데 어떤 일본인이 '똥낭'의 '똥'자를 발음하지 못하고 '돈'이라 하는 바람에 '돈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민요 속에는 여전히 똥나무로 살아 있다.

푸르러도 단풍나무 / 단풍져도 푸른나무

죽어도 살구나무 / 대낮에도 밤나무

'한치라도 백자나무'처럼 풀이에 '도'라고 하는 조사가 붙는 것은 나무이름이 실제 상황과 거꾸로 일컬어지는 역설적 상황을 노래한 것이다. 이들 풀이와 나무이름은 '푸름과 붉음, 죽음과 삶, 낮과 밤'의 대립적 맥락을 제시해 두고서, 반대 상황 속에서도 이름을 일정하게 불러야 하는 역설적 처지를 절묘하게 노래한 것이다. 살구나무에서 '삶'과 죽음을 떠올리고, 밤나무에서 '밤(栗)'이 아닌 '밤(夜)'과 낮을 떠올릴 수 있어야 이런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다.

역설적인 풀이와 달리 나무의 기능을 잘 살려서 풀이한 유형도 있다. 이런 유형에는 나무의 실제 기능을 노래한 것과, 나무의 기능이 아닌 나무이름의 기능을 노래한 것이 있다.

불에 붙여 향나무 / 홍두깨 박달나무

액마구리 복사나무 / 속 비고 대나무

봉화불에 홰나무 / 불 밝혀라 등나무

빠르기 화살나무 / 거짓 없어 참나무

향나무는 불에 붙이면 향이 나고, 홍두깨는 단단한 박달나무가 제격이며, 복숭아나무는 굿을 할 때 귀신을 쫓는 액막이 구실을 한다. 나무의 특수한 기능을 적절히 풀이하여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 셈인데, 홰나무나 등나무는 나무의 기능과 무관한 풀이를 했다. 봉화불을 올리는 데에는 홰 곧 횃불이 필요하고 불을 밝힌 것이 바로 등(燈)이니 등나무가 따라온다. 그리고 빠르게 날아가는 것은 화살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화살나무나 등나무, 홰나무가 그러한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참나무가 거짓이 없는 나무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참'의 말뜻을 풀었을 따름이다.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 입맞추자 쪽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 할 수 없이 가야나무

적절한 풀이말을 통해서 원래 나무이름이 가졌던 뜻을 재미있게 재창조하기도 한다. 구기자(拘杞子)도 '깔고 앉아 꾸기자'라고 함으로써 의미가 새롭게 전환되고 '쪽나무'도 입맞추자고 함으로써 의성어로 둔갑한다. '오자마자 가래나무'나 '할 수 없이 가야나무'도 마찬가지로 '가래'와 '가야'를 '가다'의 명령형이나 의무형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오자마자 가래!' 또는 '할 수 없이 가야' 한다는 문장을 이루게 만든다.

나무도 고목이 되면 / 오던 새도 아니 오고

요내 몸에 병이 들면 / 오던 님도 아니 오고

저 건너 저 무덤 되면 / 어떤 친구가 나를 찾나

거제군 양또순 할머니의 나무타령이다. 이제 재계 거목이자 고목인 왕회장은 6평의 무덤에 잠들었다. 노래와 달리 뜻밖에 많은 이들이 무덤을 찾았다. 왕회장은 가도 현대는 여전히 살아서 재벌의 특권을 누리는 덕이다. 거목이 스러져야 작은 나무들이 잘 자라듯, 재벌이 해체되어야 중소기업이 고루 성장되고 경제기조가 안정되는데 정부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재벌을 개혁하고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오히려 재벌보다 중소기업을, 경영자보다 근로자들을 몰아냈다. 경영부실로 거덜난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에다가 천문학적인 자금지원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재벌그룹에게 주지 않기로 했던 홈쇼핑 사업권을 안겨주는가 하면, 다시 해상 카지노 허용까지 검토하고 있단다. 현대에 특혜를 주는 데에는 원칙도 논리도 없다. 식목일인 데도 불구하고 나무타령 대신 현대타령이 판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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