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후텁지근했던 지난 토요일 오후, 대구 앞산 자락 남부도서관 3층 정기간행물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신문 스크랩을 열심히 뒤지며 뭔가를 꼼꼼하게 메모하고 있었다. 한두 해 도서관을 다닌 것 같지 않은 익숙한 태도."도서관에서 뭐하느냐고? 신문 보잖아. 몇 년 동안 주식투자를 해 왔거든. 일간지 경제면도 보고, 경제지도 보지. 도서관 만큼 신문 보기 좋은 곳은 없잖아".
17년 전 교통사고로 척추수술을 받아 1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는 대명9동의 조희제(68) 할아버지. 1995년 말 남부도서관이 문을 연 뒤 정기 휴관일을 빼곤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했다. "노인정엔 안 가. 화투 치고 장기 두는 것도 좋지만 도움 되는 걸 찾아야지. 나이 많을수록 구들목 늙은이 취급 안 당하려면 신문·잡지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거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도서관엔 책도 있고, TV도 있잖아. 무엇 보다 젊은 사람들의 공부하는 열기가 좋아".
2층 교양강좌실엔 주부들이 여러명 보였다. 자녀를 도서관 내 독서토론 모임 같은 데 데려다 주고 자신은 기다리는 시간에 교양강좌를 듣는 학부모들이 많았다. "초교생 아이를 힘들여 학원 보내는 대신, 오후에 함께 도서관에 다니는 습관을 들였어요. 엄마가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니 아이가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김명자(37) 주부가 신명을 내자, 한문강좌를 듣다 쉬는 중이라는 김정숙(38) 주부도 거들었다.
"아이들만 도서관에 보내선 책 읽는 습관을 들이기 힘들어요. 틈만 나면 컴퓨터 게임에 빠져버리거든요. 적당한 강좌가 많아 엄마들에게도 도서관 오는 게 좋구요".
옆에 있던 김정숙씨의 아들 이종헌(성명초교4년)군은 입을 삐죽거렸다. 도서관에 오는 게 귀찮다는 표정.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랑 함께 와서 친구들과 책 읽는 건 재미 있어요. 요즘은 장난꾸러기 어린이 이야기인 '창가의 토토'를 읽어요". 자랑스러워 하는듯 했다.
3층 전자자료실. 아직 익숙한 공간이 아니어서 찾는 사람은 많잖다고 했지만, 국내 도서관 중에선 처음으로 '전자책'(e-book)을 갖췄다. 컴퓨터로 책의 전체 내용을 볼 수도 있고, 필요한 부분만 인쇄해 갈 수도 있다. 모니터를 들여다 보기 싫다면, 소리로 책 내용을 듣기만 할 수도 있다.
저작권 문제가 걸려 아직은 641권 밖에 갖추지 못했지만, 확대되는 건 시간 문제. 도서관측은 각종 전자자료 활용을 돕기 위해 올해 안에 컴퓨터 50대를 더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본래 도서관의 존재 목적은 책을 빌려주고 읽는 공간이 되는 것. 그러다 점차 독서실로 변했다. 요즘도 열람실엔 공무원 시험이나 각종 자격 시험 준비자들이 대다수. 그러나 도서관은 이제 또한번의 변화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용객의 절반 이상은 이미 다른 이유로 도서관을 찾고 있는 것. 바로 평생교육이다.
그런 점에서 무엇 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분야의 교양 강좌. 대구시내 9개 공공도서관이 운영하는 강좌만 해도 200개 가까이 된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집 가까운 도서관에서 괜찮은 강좌 하나 쯤은 들을 수 있다는 얘기.
인터넷 전용선을 갖춘 컴퓨터실도 있어, 게임방 대신 자녀들과 함께 찾기에도 그만이다. 문화영화나 케이블TV를 방영하는 시청각실 역시 잘만 활용하면 가족들의 훌륭한 여가 공간이 될 수 있다. 남부도서관 경우, 200인치 멀티스크린을 갖춘 258석 소극장 규모의 시청각실에서 매주 4회 영화를 상영한다. 주말 오후 7시엔 가족 방문객을 위해 신작을 집중적으로 상영한다. 매번 꽉꽉 들어찬다고 관계자는 전했다.
공홍경(46) 문헌정보 과장은 도서관의 변화상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책만 갖다 놓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남부도서관의 하루 평균 방문객 1천700여명 중 절반 이상은 교양강좌 수강생. 때문에 앞으로는 점차 열람실 규모를 줄이고 대신 강의실·자료실, 각종 모임방 등을 넓혀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오는 주말에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집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가 보십시요. 확 달라진 시설과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공부가 될 겁니다".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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