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차창 밖으로 꽁꽁 언 상태에서 두툼한 외피처럼 눈을 덮어 쓴 강 하나가 나타난다. 아무르(Amur)강이다. 아무르강은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해 '헤이룽장(黑龍江)'이란 이름으로 중국 동만주벌판을 쓰다듬으며 흐르다 하바로프스크에 이른 뒤 북동쪽으로 몸을 틀어 오츠크해로 빠져나가는 거대한 강이다.
길이(4천350㎞)는 세계 8위, 면적(205만2천㎢)은 세계 10위로서 하바로프스크의 상징 구실을 하고 있다. 하바로프스크는 1만여명의 재러동포(고려인)들이 살고 있고, 한때 한국 기업들이 활발하게 진출했던 곳이라서 정서적으로 비교적 친숙한 도시다. IMF전까지는 한국의 크고 작은 기업체 수가 30,40개에 이르렀다.
지금은 그러나 모두 철수해 버렸다. 삼성의 가전제품은 인기가 있으나, 역시 지사는 개설되어 있지 않다. 영사관도 인근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에만 설치돼 있다. 그래서 이곳 한국어교육원(원장 양형렬)의 역할은 다양하고 중요하다. 교육원은 시내 쉐리쉐바 거리 60번지의 한 건물 10층을 임대해서 동포들과 러시아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전파하는 한편, 간헐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총영사와 협의해 비자와 여권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한다. 준 영사관인 셈이다.
취재팀이 찾은 날 마침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노란 머리의 젊은 러시아 남녀들과 재러동포 30여명이 한국어 강의방법에 관한 강의를 듣고 있었다. 현재 러시아에는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 등 3곳에 한국어교육원이 개설돼 있는데, 올해 안에 우즈베키스탄의 북카프카스에 한 곳이 추가로 설립될 예정이다. 하바로프스크 교육원은 지난 97년 8월에 설립됐다. 양 원장은 2대 원장이다. 그는 서울시 교육청 장학사로서 교육부 국제협력과에서 파견근무를 하다 지난해 8월 가족과 더불어 이곳에 왔다.
임기는 3년이고 1년씩 두 번 연장이 가능한데, 양 원장은 연장근무를 자청할 계획이다. 그는 지금 안전문제를 고려해 러시아 극동 사령부의 군장성 관사 성격의 아파트에 입주해 살고 있다. 사실 하바로프스크는 불안감을 주는 도시다. 양 원장에 따르면, 9개 대학에 한국어과가 개설돼 있을 정도로, 이곳에서 한국어의 인기는 높다. 사범대에는 대개 한국어과가 개설돼 있으며, 중고등학교에서도 제1 혹은 제2 외국어로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교육원에서는 16세 이상 재러동포 180명이 매일 오후 4시부터 2시간 가량 교육을 받고 있다.
사무실에는 한국어 교재와 문학도서, 한국영화 비디오 테이프들이 다수 비치돼 있고, 국제한글용 자판을 갖춘 컴퓨터도 두 대 있다. 문학도서들과 비디오는 순환이 매우 잘 된다. 그러나 교육원으로서 감당하기 힘겨운 난제들도 산적해 있다. 가장 커다란 난제는 재정문제다. 양 원장에 따르면 현재의 재정적 규모로서는 한국어 교육 기관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가 힘들다. 그는 하바로프스크의 학교들이 대개 백묵 대신 석필을 쓰고, 지우개가 없어 걸레를 사용할 정도로 사정이 열악하다고 전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한국어'와 관련된 러시아인들과 재러동포들은 흔히 중국·일본과 한국을 대놓고 비교하곤 한다.
우선 중국과 일본은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그리고 자국어를 제1 외국어로 채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은 교민들이 전무한데도 일본어 관련 학과에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자국연수도 주선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방치하고 있다. 정부 초청 장학생도 지금까지 1명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동포에 국한돼 있어서 순수 러시아인들은 불만이 많다. 최근 동서식품 재단에서 지원 의사를 밝혀 와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재정문제는 교육원에서 현지 교수 요원을 확보하는데도 애로를 느끼게 만든다. 교육원의 교원 초봉은 월 800루블(한화 약 3만3천600원)에 불과해서 대부분의 한국어 구사 가능 인력은 통역쪽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보인다. 지난 98년의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위기 이전 한국 기업의 지사들이 모두 철수해 버려 인력활용에 한계가 있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현지 교원은 현재 5명인데, 교육원측에서는 이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기자재비를 돌려서 변칙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실정에 맞지 않는 교재 역시 개선되어야 할 점이다. 현재 사용중인 교재는 수준별 구분이 돼 있지 않아서 초등학생과 대학생이 똑같이 동일한 교재를 사용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형편이다. 나이 든 재러동포들도 이런 점을 아쉬워 하고 있다. 사할린에서 이주해 와 이산가족 상봉 작업에도 간여한 적이 있다는 김용남(56)씨는 "1945년 이후 출생자들은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그 이후 세대들은 거의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필요에 의해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 수는 미미하다. 한국이 이대로 방치해 둔다면 민족감정을 토대로 한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지고 말 것이다. 젊은 세대는 한국을 완전히 다른 나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우려했다. 아닌게 아니라 앞으로는 전 세계의 동포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한 데 묶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될 것으로 보이는데, 하바로프스크를 비롯한 시베리아의 동포들은, 지금이 적극적인 행동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하바로프스크= 글: 이광우기자, 사진:강원태기자
0..시베리아 여행때 주의할점
러시아, 특히 시베리아 지역을 여행할 때는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호텔에 도착하면 프런트에서 여권과 비자를 달라고 한다. 거주지등록을 하기 위해서다. 러시아에는 입국 후 3일 안에 거주지등록을 해야 하는 '레기스트라챠' 제도가 있다. 중국인 불법체류자가 100만명에 이른다니 사정이 이해가 되긴 한다. 경찰서에서 비자용지에 스탬프로 확인 도장을 찍어주는데, 외국인이 직접 등록을 하는 것은 만용에 가깝다고 한다. 여행자수표(T/C)나 신용카드는 애물단지다. T/C 환전시에는 은행측에서 거꾸로 2~3%의 환전수수료를 받는다. 은행 가운데 '알파방크'가 그중 낫다. 신용카드는 호텔외에는 잘 쓰이지도 않으며, '비자'와 '마스터카드' 두 종류만 유용하다. 공항의 '외국인 입국심사대'는 악명 높다. 10명 정도가 통과하는데 보통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출국 때도 세관을 통과하는 게 난제다. 소박한 것이라고 해도 미술품이나 훈장 따위를 사서 들고 나가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심한 경우에는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징역을 살아야 한다. 이광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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