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오후

입력 2001-03-12 15:19:00

오오 이제 정을 떼시게 남쪽 창과비록 남쪽 창을 열면

두류산이 뒤로 슬쩍 제끼고 누운 모습 보이고

그걸 두 무릎 사이에 끼우고 배 위로 올려놓은 듯한

앞산의 자리는 멀리 있어도 정확하지요

이제 몇 달 남지 않았습니다 두류산과

남쪽 창 사이에 우리 아파트단지보다 키 큰

새 아파트 단지 솟아오르는 일

그제서야 우리 단지가 오랫동안 가리고 있었을

뒤쪽의 수많은 남쪽 창을 생각해냈습니다

비록 남쪽산의 진달래나 찔레순 맛을 본 사람만이 더욱 알지라도

그동안 나는 밤새 안녕하지 못한 시조부의 생생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허공을 파먹고 욕망의 똥을 쌀 새아파트 단지가

밤낮없이 설치는 가운데 견뎌낸 할아버지의 죽음이었으므로

- 고희림 '남쪽 창을 열면'

고희림은 대구 출신의 신예시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시의 공간도 대구이다. 남쪽 창을 열면 두류산과 앞산이 겹쳐 보이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이웃에 더 높은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귀중한 남쪽 창을 막아버린다.

이 상황에서 그간 자신이 막아왔던 '뒤쪽의 수많은 남쪽 창을 생각해'내는 마음은 사실 작은 것 같지만 큰 마음이고 자기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한 마음이다. 시의 마음이다.

김용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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