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권 보장없는 지방자치 '공허'

입력 2001-03-01 14:09:00

"경북도내 산업체 중 중소기업의 비중이 90%를 넘는데도 중소기업을 지원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책을 펼 수가 없다.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진흥공단 등 국가기관이 지원자금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이병한 경북도 자치발전 담당).

"정부가 규정한 정원 내에서 필요한 부서를 신설하거나 실·과의 직원 한명 조정하는 일도 행정자치부의 승인을 받아야 할 정도로 중앙정부가 지자체의 손발을 묶어놓고 있다"(황대현 대구 달서구청장).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도 여전히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의 말단 집행기관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자체들은 그동안 시도지사협의회, 기초단체장협의회 등을 통해 기능이양 확대, 지방재정 확충, 조직 및 인사권 확대 등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중앙정부와 정치권은 분권을 추진한다면서 지난 99년 중앙행정권한의 지방이양촉진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지방이양추진위원회를 신설했지만 막상 일을 추진하는 데는 소걸음이다.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할 사항은 국가사무의 지방이양. 국가 전체 사무(1만5천774건) 중 중앙정부가 맡는 국가사무와 성격상 국가사무이나 지자체에 위임한 기관위임사무 등이 82%에 이른다.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의 지방사무가 전체 사무의 30%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우리의 지방자치의 수준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런 체제에서는 주민을 위한 지역 밀착형 행정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렵다.

김대중 정부는 이런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해 출범 초부터 1천401건의 지방이양대상사무를 선정, 99년 1월 지방이양합동심의회를 개최해 이 중 834건을 확정했다. 그러나 99년 상반기까지 이양이 마무리된 것은 이 중 절반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양된 사무도 관련 법(령)이 개정되지 않아 업무만 지방에 왔을 뿐 당연히 따라와야 할 알맹이인 재정, 인력 지원은 없어 지차제의 업무 부담만 가중시켰다는 것이 지자체의 불만이다.

김진복 영진전문대 지방자치연구소 소장은 "국가가 지방에 위임한 사무는 실질적으로 업무를 집행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에 모두 이양해야 한다"며 "사무 이양을 할 때는 관련 업무 전체를 넘겨야 하고 근거 법령의 개정이 동시에 이뤄져야 온전한 이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한 이양 중 핵심으로 떠오른 부문은 특별행정기관의 사무를 지자체에 이관하거나 통합하는 문제. 지방노동청, 지방병무청, 지방식약청, 농산물검사소 등 총 316개에 이르는 특별기관이 지방행정의 종합성과 민주성을 침해하고 업무의 중복 등을 낳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행정전문가들은 특별행정기관의 기능 중 국도·하천 유지, 통계, 보훈, 노동, 환경, 병무, 조달 업무 등은 지자체에 이양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조직과 인사의 자율권에 대한 요구도 거세다. 현재 국가직 4급 이상의 전보 권한은 행자부 장관에게 있고 시·도지사는 임용제청권만 갖고 있다.

더욱이 지자체의 총 정원은 행자부가 관리하고 과 단위 이상의 조직 개편 역시 행자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가능하다.

중앙정부가 공무원 정원 운용을 위해 만든 표준정원 산출기준 역시 통제의 성격이 짙다. 지나치게 획일적이며 이마저 서울특별시에 비해 다른 지자체들은 차별대우를 받는다. 대구 동구는 인구 33만8천명, 면적 182.35㎢, 20개동 규모로 구청의 공무원 정원은 758명. 공무원 1인당 주민수가 446명이다.

반면 서울 성동구는 인구 32만1천명, 면적 16.84㎢, 20개동으로 대구 동구보다 인구나 면적으로 볼 때 규모가 작지만 공무원 정원은 1천305명이나 된다. 공무원 1인당 주민수(245명)가 대구 동구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 심성택 대구시 조직관리담당은 "지자체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인사나 조직 신설권은 지방의 행정 수요에 맞게 운용할 수 있도록 지방에 모든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치입법권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얼마 전 충북도의회는 행정에 대한 견제와 주민 참여를 강화하기 위해 '옴부즈만' 조례 제정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조례안 중 지자체에 관련 사무국 조직을 만들려는 조항이 총정원을 규정한 법령에 위배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대구 동구청 역시 소음 등에 시달리는 공항 인근 주민들의 구세를 감면하려고 조례개정을 추진했으나 조세 형평성 등을 이유로 허가권을 쥔 행자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박성태 대구시의회 의원은 "자치행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례가 상위 제도에 얽매여 지자체나 지방의회가 창의적인 조례를 만들려고 해도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헌법 제117조는 조례제정을 '법령의 범위 안에서'라고 규정하고 지방자치법 제15조는 '주민의 권리제한 또는 의무부과에 관한 사항이나 벌칙을 정할 때는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고 돼 있어 자치입법권을 크게 침해하고 있다.

조례란 명칭을 아예 '지방법'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주목할 만하다.

자치입법권에 대해 소영진 대구참여연대 지방자치센터 소장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조례를 제정할 수 있게 한 것은 지자체를 행자부의 하위기관으로 보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라며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적어도 법령이 아닌 법률의 범위 안에서 조례를 제정토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의 목소리가 국가정책 수립과정에 반영되는 제도적 틀이 필요하다.

학계는 이를 위해 독일의 연방상원제도와 비슷한 지방원의 설치를 제안하고 있다. 지자체에 관련된 법률의 제안권을 인정하고 입법 심의 절차에서 청문권, 동의·거부권, 이의 제기권 등을 인정하는 법적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다.

또 행자부를 폐지해 총무처나 민방위본부 등으로 분산 격하하고 지자체 사이 조정업무는 지자체 협의회가 맡도록 중앙정부의 통제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중앙정부 부처의 지방이전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안이다. 국가단위의 행정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해야 서울 일극 집중을 타파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김교영기자 kimk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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