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파동 日정부 입장

입력 2001-02-22 00:00:00

1980년대 '교과서 파동' 재연의 시한 폭탄을 안고 있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측의 역사 교과서 검정 문제 등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주무 부처인 문부과학성에서 검정 작업이 진행중"이라는 것이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를 비롯한 정부 당국자가 그동안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 장관 등 한국측 인사를 만날 때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되풀이해 온 거의 유일한 공식 입장이다. 한국 등에 대한 배려로서는 "한국 정부의 입장에 유의하겠다"는 것이 사실상 전부였다.

그만큼 '새 교과서…모임'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 등 일부 교과서의 역사 왜곡 및 합리화 문제가 한국, 중국 등 주변 당사국에 얼마나 엄청난 충격과 심각한 사태를 몰고 올지 일본 정부가 당사국 못지 않게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 일각에서는 다음 달에 윤곽이 드러나게 될 문부성의 검정결과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문제의 교과서에 대한 한국 등의 거센 반발을 고려, 검정에 더욱 신중을 기하기 위해 검정 통과 결정이 당초 예상보다 다소 늦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최근 들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주무 부처인 문부성과 외무성간의 민감한 입장 차이도 감지되고 있다. 문부성의경우 이번 2002년도판 중학교 역사 교과서 등의 검정 작업을 둘러싸고 그야말로 철통 보안과 함께 이례적인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반면 한국, 중국과의 외교 창구인 외무성은 2국간 관계 등을 고려해야 하는 기본 입장 때문에 '비공식적으로는' 곤혹스러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외무성 입장에서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 과정에 '개입'할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982년의 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당시 일본 정부가 재발 방치책의 일환으로 한국 등 주변국에 제시한 '근린제국 조항'(근린 아시아 제국이 관련된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에는 국제이해와 국제 협조의 견지에서 필요한 배려를 한다는 내용)을 토대로 문부성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역사 교과서의 사실왜곡은 "지난 98년 과거를 직시키로 한 한일 양국의 파트너십 선언에도 위배된다"는 점을 문부성에 전달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다.

한국, 중국의 주된 외교 채널인 외무성의 이같은 역할은 그러나 지난 해 10월 문부성의 '교과용 도서 검정 조사 심의회' 위원으로 참여했던 전 외무성 간부가 자민당 등 우익 세력의 압력에 밀려 경질되는 '사건'을 계기로 거의 기대하기 힘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익 세력을 대변하고 있는 산케이(産經) 신문이 교과서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전 외무성 간부가 '새 교과서…모임'의 교과서를 불합격시키도록 다른 심의위원들을 설득했다고 보도, 자민당 우파 의원들이 들고 일어나 파면을 요구했던 당시사건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과서 검정의 현주소와 역학 관계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한마디로 과거 일본 정부가 근린제국 조항 준수를 약속했듯이 주변국의 반발과 압력에 또다시 굴복, 이 교과서를 불합격시키기 위해 외무성 등이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우익세력의 역공세가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외무성의 '움직임'은 심의위원 경질 사건을 계기로 눈에 띄게 위축된 모습이다. 우익 세력의 집중 포화를 각오하지 않는 이상 대놓고 문부성에 주변국의 입장을 전달하기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단 이같은 입장 뿐만 아니라 교과서 기술 내용을 어떻게 수정할 지의 구체적인 사항은 문부성의 전관 사항이기 때문에 외무성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한국 정부 등이 그동안 일본측을 상대로 교과서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공론화할 수 없었던 사정의 하나도 이러한 역공세와 역효과를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일본 정부는 '새 교과서…모임'측이 2차 수정본을 제출함으로써 검정 통과가 확실시되고 있는 것과 관련, "검정위원회의 검정 결과를 지켜보되 최종 결정은 문부과학상이 내리기 때문에 결론이 나오기 전에 너무 성급하게 단정은 말라"는 입장을 비공식으로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민당을 비롯한 일본 진보 진영의 세력 약화와는 대조적으로 이른바 신보수주의 세력의 등장으로 거대한 우경화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고 있는 최근의 일본사회 흐름을 감안할 때, 문제의 교과서가 일선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는 것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지 않으냐는 게 이곳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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