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창가에서-윤주태(출판부장)

입력 2001-02-17 14:42:00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는다. 워낙 허망한 질문이라 그런지 이쪽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본인도 겸연쩍은 듯 웃는다. 내가 이런데 너라고 무슨 큰 행복감을 갖고 살겠느냐는 자조섞인 웃음이다.

자녀의 대학입학을 축하한다며 말이라도 붙이면 "요즘 대학 나와봐야 무슨 소용있냐"는 싸늘한 반응이 대부분이다. 그리고는 금세 이렇게 말끝을 흐린다. "그렇다고 대학을 안 보낼 수도 없고…"

후진국일수록 경제가 어려우면 부의 편재가 심화돼 상류층을 노린 흥행산업은 오히려 호황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도 가진 자들조차 "흥청거려봐도 별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뭔가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그럴 신명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댐이 터졌는데 그 밑에서 도랑 청소해봐야 무슨 소용있겠느냐고 반문한다.

정부는 이달말까지 4대부문 구조개혁을 마무리하겠다고 장담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경기활성화에 불을 댕길 계획이지만 벌써부터 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에도 속병은 고치지 못하고 대강 얼버무려 넘어간다면 국민들의 '개혁피로감'은 '개혁분노'로 돌변할 것이다. 맹자도 "민생이 도탄에 빠져 이놈의 세상 언제나 망할까, 나 너와 더불어 함께 망하련다"는 상황에 이르면 사회가 온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 아주 희망적인 사건이 하나 터졌다. 한국 축구의 변신이 그것이다. 스포츠에는 문외한이지만 그 연출의 주연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나왔다. 이미 박찬호 박세리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이 한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이고 있는 마당인데 아직 아시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축구가 조금 변했다고 해서 무슨 호들갑이냐고 야단할지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히딩크가 사령탑을 맡은 이후 얘기한 것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잔재주가 좋더라도 체력이 약한 선수는 기용하지 않겠다. 폭넓은 선수층에서 인재를 발탁하겠다. 포지션에 걸맞은 선수를 배치하겠다" 등이다. 그야말로 식상할 정도의 기본적인 얘기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서 그가 남달리 돋보이는 것은 그같은 말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그는 하루 아침에 한국축구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아주 단순한 '축구철학'을 실천함으로써 조직을 바꿔 놓은 것이다. 체력 위주로 선수를 뽑으니 선수들은 자기 체력보강에 열심이라 자연히 기초가 튼튼해 질 것이다. 또 능력만 있으면 그 선수가 어디에 있던 과감하게 기용하니 선수들은 잡생각 없이 자기연마에 열중이다. 게다가 그런 선수들을 적성에 맞게 배치해 놓으니 선수들은 얼마나 신명나게 뛸 것인가.

아직 한국축구가 가야할 길은 멀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이렇게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어느 분야에서나 경쟁력을 높이려면 정정당당한 경쟁이 전제돼야 한다. 경쟁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부패와 인정주의다. 우리나라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것도 근본적으로 이 두 가지 요인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나라 지도자들은 히딩크로부터 배워야한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은 얼마나 '체력' 위주로 사람을 뽑았는가. 잔재주만 있는 '예스맨'들 속에서 스스로 울타리를 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는가 반성해야 한다. 또 넓은 데서 경쟁을 통해 인재를 두루 등용하려는 탕평책을 쓴 적이 있는가.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사람을 쓰고 마는 패거리주의(cronyism)에 빠지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가. 혹시 아부 순서대로 권력서열을 매기지는 않았는가.

외국인 축구감독으로부터 경제학을 배워야하는 현실이 참담하지만 그만큼 우리 경제는 기본부터 새로 쌓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한 상황임을 인식해야 한다. 기본에 충실하면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경제원론을 히딩크 감독이 보여 준 것이다.한국축구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경제의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예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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