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는 2001년을 '지역문화의 해'로 선포했다.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발전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다. 그런데 '지역문화의 해' 추진위원 구성이 웃긴다. 위원 26명 대다수는 중앙부처 공무원과 서울지역 학계·문화계 인사 일색이고 지역 문화인은 고작 2명이다. 지역문화의 해는 결국 지역은 배제한 채 중앙이 주체인 셈이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을 우습게 보는 오만한 행정이 아닐 수 없다.
지방에서 연극·영화·공연 관객들이 입장(관람)료의 6~6.5%씩 내는 문예진흥기금은 몽땅 문화관광부 산하 문예진흥원이 가져간다. 조성되는 기금은 연간 200억원을 웃돌지만 중앙부처와 중앙 문화인들의 입김이 가해진 뒤 지역에 되돌아오는 돈은 쥐꼬리 수준이다. 대구의 경우 '문화예술진흥'을 위해 연간 되돌려받는 돈은 전체 기금의 1%(2억여원) 정도다.
기획예산처는 최근 이 기금의 관리와 분배가 문제를 일으키자 규제완화를 명목으로 내년부터 기금모금을 폐지하고 공공기금으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체재원 마련방안이 없는 상태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정부지원 규모만 줄게 될 공산이 크다. 결국 기금운용이 불투명하고 왜곡돼왔다는 것을 중앙부처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전국 국·공립 도서관 400여개, 공연장 150여개, 박물관 50여개, 문예회관 90여개 중 90%이상이 서울에 몰려있다. 대구의 경우 공연장이 17개 있으나 객석 1천석 이상의 대공연장은 경북대강당, 시민회관, 문예회관이 전부다. 그나마 객석 600~800석의 중규모 시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박현순 대구연극협회장은 "중앙부처가 공연지원금을 쥐꼬리만큼씩 분배할 게 아니라 공연장 하나라도 제대로 세워주는 효율적 기금운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구연극협회에 16개 극단이 가입해 있지만 연극 전용극장은 극단 예전 1곳 뿐이어서 마땅한 연습 공간조차 없다. 협회의 연간 공연지원금도 5천만원으로, 서울연극협회의 24억원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이균옥 민예총 대구지회장은 이같은 지역-중앙 문화의 현실을 '문화권력의 중앙집중화'로 표현했다.
임재해 안동대 교수(민속학)는 "문화재정, 인력·단체, 시설 등 문화인프라 전반이 중앙에 집중돼 있다"면서 "지역문화운동이 중앙중심의 문화종속에서 벗어나 문화자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인들은 척박한 지역문화 토양의 또다른 이유로 '문화정책의 관주도'와 '행정담당자들의 비전문성'을 들고 있다. 수년전 대구의 한 공연기획사가 연극 '셰익스피어'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시민회관 담당자을 찾았다가 '공연을 하려면 작가인 셰익스피어의 동의서를 받아오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얘기는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지난해 달구벌축제에는 '24시간 논스톱 록페스티벌' '컴퓨터게임대회' '청소년을 위한 퓨전콘서트' 등 예전과는 달리 '젊고 독특한'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기획됐다. 그러나 대규모 군중을 모을 수 있는 '소싸움'과 달리 인원동원 등 운영상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전체 기획프로그램의 30% 가량이 중도 하차했다. 행정담당자들에겐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전시성 행사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이강은 경북대 교수(노어노문학)는 "문화예술분야 담당공무원들이 전문성이 떨어지는데다 잦은 인사이동으로 인해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곤란하다"며 "문화행정에도 전문인력 양성과 문화인 영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대중문화와 '골목문화', 민속문화를 기피하는 문화행정의 편식도 지역문화가 주민속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요인으로 문화운동가들은 꼽는다. 특히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중앙집중적인 문화권력의 탈피와 함께 주민밀착도가 높은 지역 자체의 '문화혁신'을 스스로 꾸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역에는 '춤'과 '사물놀이' '마당극' '독립영화·애니메이션' 분야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날로 늘고 있다. 대구의 경우 힙합과 브레이크 댄스를 비롯한 다양한 춤을 향유하는 10대 수백명이 여름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예회관앞, 신천둔치를 비롯해 동네 소공원을 헤맨다. 만화지망생도 1천명이 넘고 '만화 소모임'만 100여개에 이른다. 대학, 고교생은 물론 중학생들까지 북, 장구, 꽹과리, 징을 둘러메고 우리문화 전통잇기에 땀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물론 거리에서조차 이들 젊은이들은 내몰리기 일쑤다. 지방자치단체는 이들 청소년을 위한 축제는 물론 놀이공간조차 제대로 마련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최원준 (주)파워엔터테인먼트 대표는 "대중가수 콘서트를 유치하려면 지역 공연장의 경우 문예진흥기금 6%외에 30%의 부담금을 별도로 내야 한다"며 "콘서트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는 공연장이 있을만큼 대중문화에 대한 경시풍조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골목문화 주창자인 조성진 대구축제문화연구소장은 "동성로, 봉산문화거리, 약령시를 비롯해 시내 아파트단지, 소공원 등 열린공간의 활용이 절실하다"며 "행정기관이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어우러질 수 있는 여건조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특성을 내세운 대표적 문화이벤트의 부재도 지역문화 활성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대구의 경우 달구벌축제를 비롯해 구·군별로 '대덕문화제' '팔공문화제' '구민축제' 등 다양한 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으나 어느 하나 지역의 대표적 문화행사로 내세우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여상법 대구문예회관 학예연구사는 "부산 국제영화제, 춘천 마임·인형극, 안동 탈춤페스티벌, 경주 문화엑스포 등에 비춰볼 때 대구에도 독특한 문화이벤트 개발이 필요하다"며 "올해 지역에서 '국제 전자음악 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문화계에서는 '지역문화의 해'를 맞아 중앙집중의 문화권력 탈피와 지역 문화혁신이 주요 담론으로 대두하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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