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 망하려면 근친상간 같은 터무니없는 불상사가 생겨난다. 근친상간은 인류가 가장 금기하는 죄악이어서 도덕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한 국가나 민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국제화(國際化)니 국제감각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 유행에 뒤지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위기의식 같은 것이 팽배되어 너도나도 해외로 눈을 돌려야 산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국제적 감각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에 길들여지고 키워지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이 살과 피가 되었다가 우리의 감각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살아온 탓으로 다른 민족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중국인들이 한족(漢族)이 모여 살던 중원을 화(華)라 하고 변방의 여타 민족들을 오랑캐로 몰아붙이면서도 이들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화 공화국(中華共和國)'을 세운 것과는 크게 대조가 된다. 중국은 미국처럼 합중국이 되어 사이팔만(四夷八蠻)을 품에 안고 성장하고 있다. 동이(東夷)의 하나였던 조선족이 연변을 중심으로 자치구를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 좋은 예이며, 미국이 '약소민족보호법'이란 것을 만들어 이것을 제대로 지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 땅에 들어온 타민족에게 과연 이런 혜택을 주었을까, 어림없다. 타민족을 수용하지 못하니 편파적으로 흐르고 이런 편파성은 은연중에 흑백논리를 낳는다. 흑백논리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퇴보시켰으며 앞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장애요소로 작용하려는 지는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는 같은 피부에 같은 색깔로 태어났으면서도 가까운 혈족이 아니면 남으로 취급하고 적대한다. 우리처럼 족보를 귀하게 여기는 민족이 없는 것을 보아도 우리가 씨족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 지 알만하다. 거기에다 학교, 고향, 종파와 교파 따위로 한없이 좁은 골목으로만 갈라진다.
단일 민족이란 사실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단일 민족은 지나치게 순백(純白)을 강조해서 조금이라도 다른 색깔이 섞이는 것을 싫어한다. 이런 편협성은 끝내는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촌스러움에 빠져든다. 자기 것만을 고집한다면 자기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에 비례하련만 그 점에서는 오히려 반비례하니 아무 짝에 소용이 없다.
끼리끼리만 모인 결과가 모든 분야에서 근친상간을 보편화시켰다. 근친상간이 판치면 학문이나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기능이 열성(劣性)으로 퇴보한다. 우리의 이웃 일본인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모방의 단계를 거쳐 급기야는 자기 것을 만들어 내는 동안 우리는 촌스러운 고집만을 앞세우다가 시간 낭비만을 일삼아왔다. 형님 아우하면서 끼리끼리만 나누어 먹는 폐습이나 지방색은 어떠한가. 그것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총리가 고위 공직자를 쓰는 문제를 놓고 특정 고교 운운하는 궁색하고 웃기는 발언을 할까.
각계각층에서 촌스러움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정치판의 촌스러움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야(野)에 몸담았다가 정권을 담당하게 된 사람들은 몸에 배였던 거칠고 촌스러움으로 안에서는 웃음거리를 낳고, 밖에서는 실리를 빼앗긴다. 또한 야당은 양지에서만 살아온 버릇으로 음지에 적응 못해서 야당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 그뿐인가. 개혁의 바람은 요란한데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과거의 그것처럼 서슬이 시퍼런 권력을 빌린 힘의 개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얼마나 허망했던가는 과거 정권들이 이미 실증을 해 보였음에도 여전히 사정(司正) 의 힘을 빌려서 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의식(意識)에서 비롯된 개혁만이 역사를 바꿀 수 있음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친상간이 아닌 신선한 피와 함께 폭넓은 포용력(包容力)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왜 깨닫지 못하는가.
한양대 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