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형들의 옷

입력 2001-01-17 14:08:00

딸애에게 겨울 코트가 생겼다. 아내가 회색 오리털 외투를 한 벌 사준 것인데 아주 따뜻해 보인다. 허나 색상이 무채색이라 여자아이 것으로는 좀 투박해 보였다. 그 이유를 아내에게 물으니 남동생이 크면 물려주기 위해서란다. 고개가 끄떡여졌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나의 부모님은 사남 일녀를 두셨다. 가운데 딸 하나를 두고 위아래로 아들이 둘이다.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형제 많은 집은 늘 그렇듯 큰 형의 옷은 둘째 형에게, 둘째 형이 입던 옷은 나에게 넘어오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나에게는 누빈 옷(?)이 많았다.

한번은 부친의 친구분이 우리 형제 모두에게 겨울 외투를 한 벌씩 사준 적이 있었다. 허나 모친의 말씀대로 조심성이 없었던 나는 그 옷을 어느 추운 겨울날 초등학교 난로 가에서 멋있게 태워먹고 돌아왔었다. 그 옷도 결국 누벼졌고 이 일로 인해 새 옷 입을 자격은 영구히 박탈된 셈이 되었다. 눈치 빠른 동네 친구들이나 집안의 친척들은 대번에 내가 입은 형들의 옷을 알아채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도 상하고 한편으로 새 것에 대한 갈망도 암암리에 강렬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이는 삶 속에서 형제들의 존재에 대해 깊이 각인될 터이고,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이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라고 아무 일 없이 성장했음에 가슴을 쓸을 것이며, 그간 살아온 세월의 기억을 새삼 떠올리다 '그 때는…' 하며 삶을 반추할 수도 있을 터이다.

나도 지금 그렇게 느끼고 싶다. 아이들을 키운 지 1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큰 애 옷을 작은 애가 입는 모습을 보고 사고 없이 무사히 자라준 것을 고맙게 느끼고싶다. 커 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간 살아오며 들끓었던 우리 부부의 무수한 허욕과 실수, 그 고됨을 그런대로 넘어섰던 일을 되새기고 싶다.

대구대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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