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서경석-대구대 교수·국문학)

입력 2001-01-10 14:05:00

새해 들어 오랜만에 아흔이 넘으신 외할머니께 세배를 갔다. 두 외삼촌, 이모들이 모두 장성하여 모시고 사니 참으로 편안하게 보였다. 20여명의 손주, 외손주를 두셨으니 당신이 세상에서 하실 일은 다 하신 셈이다. 기억력이 좀 떨어지신 것말고는 아직 건강해 보이신다. 나는 그런 외할머니를 보며 늘 외할아버지를 생각한다.

외할아버지는 해방 전에 황해도 사리원에서 은행원 노릇을 하셨단다. 해방 후 북한 정권이 들어서자 자본주의의 '소굴'인 은행도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조사를 받는 외조부를 뒤로하고 외할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월남을 감행하셨다. 서울 토박이인 외조부의 의견이었다. 갓난 아이였던 막내외삼촌을 등에 업고 줄줄이 어린 것들의 손을 놓칠세라 서해안 갯벌가를 따라 한밤중에 남으로 내려오는 장면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서울로 부산으로 터전을 옮겨가며 외할머니가 한 일은 이젠 옛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삯바느질이었다. 한 땀 한 땀 떠가며 자식들의 학교 월사금, 연탄과 밥을 해결해 나가셨다. 자식들이 잠든 후 뜨는 삯바느질은 더욱 애달펐을 것이다. 두고 온 남편은 어떻게 지낼까.

단장의 세월을 보낸 건 외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토끼 같은 자식들과 아내 생각에 편한 밤이 하루라도 있었을까. 풍편에 들은 바로는 외할아버지는 6·25가 나기 전 노령(露領) 쪽으로 떠나셨단다. 다른 방식으로 남쪽 행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땅에서 풍찬노숙 하며 평생을 갯벌을 건너가던 가족 걱정으로 사셨을 것이다. 이제 외할머니는 편하시다. 그러나 그 과거의 상처가 아물었을까. 깊게 패인 할머니의 주름살이 분단의 금으로 보이는 것은 외손인 나만의 생각일까. 이산가족의 아픔은 아무 말씀 안하시는 외할머니의 마음 속에도 아직 산처럼 남아있다.

대구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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