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으로 가자(1)-지방화 10년...

입력 2000-12-30 14:32:00

지방화 시대를 외친지 10년. 지방의회에 이어 민선단체장이 등장하면서 굴곡진 지방민의 삶이 확 펴질 것 같았다. 그런 장밋빛 기대는 이내 더 큰 실망으로 내려앉았다. 모든 권한을 움켜쥔 중앙은 여전히 지방을 호령하려 들고 있고, 피폐한 지방의 붕괴음은 더 빠르고 더 크게 울리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방은 완전히 죽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 아우성은 갈수록 하늘을 찌르고 있다. 지방의 살 길, 지방의 권한을 찾아야한다는 외침이 부쩍 늘었다. 이에 매일신문은 2001년 대기획 시리즈로 '지방분권으로 가자'를 결정했다. 지난해 반향이 컸던 '지방이 무너진다' 시리즈에 이은 두번째 지방 살리기 기획이다.

편집자

"이상해요. 서울엔 외환위기 여파가 벌써 끝났는지 차가 더 많아졌어요" IMF한파로 온 나라가 떨고 있던 지난 98년말, 서울에서 바둑판 판매업을 하는 문장훈(39)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른 장사와 마찬가지로 바둑판이 팔리지 않을 정도로 경기가 엉망인 판에 확 줄었던 차량이 갑작스레 늘어난 게 아무래도 이상했었다.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 급작스런 외환위기로 움츠렸던 서울의 부자들이 다시 고개를 내민 게 큰 이유였지만 그 차량 행렬속에는 또다른 '작은 사연'도 끼여 있었다. 그 전까지 서울의 대기업들이 민선단체장 시대를 맞아 이른바 '지역 밀착'을 위해 다투어 내려보냈던 지방 기구를 다시 줄이면서 파견 인력이 다시 서울로 몰렸던 탓이었다.

이제 '지역밀착'을 전략으로 내세우는 기업은 없다. 지방은 투자대상지가 아닌 상품 판매처 일 뿐. 대기업들은 경제가 거덜나 구매력을 상실한 특정 지역은 광고·판촉 대상에서조차 아예 제외하고 있을 정도다.

서울로 서울로…. 사람의 절반 이상이 서울, 인천, 경기에 산다. 자연히 돈, 기업, 정보 할 것 없이 모두 수도권만 미어터지고 있다. 지방이 무너지면서 돈과 정보를 좇아 수도권으로 사람이 몰리는 현상은 지금 이 순간도 진행중이다.

컴퓨터시장 조사 및 프로그래밍 업체인 리서치넷 사장 이쌍규(35)씨. 창업 1년여만에 중기청 기술혁신 개발사업자, 병역특례업체 선정 등 잘 나가는 벤처회사를 한창 키우고 있는 그도 요즘 서울을 바라보고 있다. "자금 조달이 너무 어렵습니다. 두군데인 벤처캐피털의 자금이나 중기육성자금은 그림의 떡이죠. 담보를 요구하거든요. 정보와 우수인력 때문에서도 서울로 가야 성공한다는 생각이 듭니다"중앙집중도는 각종 경제 지표에서도 확연하다. 대구시 국제교류계 윤인현(30) 팀장의 얘기다. "최근 공장가동률, 실업률, 어음부도율 등 각종 경제지표를 종합분석한 결과 부산의 경기가 가장 나쁘고 대구, 광주가 그 다음이었다. 서울에서 멀수록 경제가 어려운 현상이, 경제의 서울 집중현상을 극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서울 중심의 사고는 가히 병적이다. 법원, 검찰 인사들은 서울 가까이로 이동하려 기를 쓰고 그래야 '영전'이다. 예전엔 서울, 부산, 대구 순서로 영전을 따졌고 지방민들은 아직 그렇게 알고 있지만 서울 사람의 생각이 달라진 것. 직원들이 서울에서 출퇴근이 편한 곳을 선호하고 기관도 슬그머니 서울 중심의 인사를 하고 있다.

서울 사람의 사고엔 그들 이외는 모두 '시골'이다. 대구가 250만명이면 국제도시 수준임에도 그들의 사고엔 부산, 대구, 광주 모두 시골이고 지방일 뿐이다. 한국과학기술원을 거쳐 삼성그룹에서 근무중인 여정호(34)씨는 "서울밖에 모르는 서울사람에게 지방위주의 정책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잘라 말했다.

공룡화, 비대화로 치닫는 서울, 자생력마저 잃고 왜소화하는 지방. 이런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깊어지는 상황인데도 지방은 지방끼리 시기하고 헐뜯기에 바쁘다. 선거 때만 되면 악령처럼 살아나는 영호남 지역감정, 대구-부산의 낙동강 분쟁에 따른 소아적 감정대립. 이를 확대해 입신 출세에 악용하는 무책임한 정치인. 20년째 택시를 몰고 있다는 김성호(52)씨는 "지역구에서 당선만하면 지방은 돌아보지 않는 채 중앙위주 논리에 휘말리는 '서울 국회의원'을 뽑는데 그렇게 열을 올렸던 게 허망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지방자치단체는 또 우물안 개구리 수준이다. 지방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수도권 위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구조를 바꾸려는 몸부림이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고작 다른 시도만 쳐다보고 있다. 지하철 예산을 요구해도 '부산, 광주 보다 많게'가 전부다. 한 지자체가 산뜻한 프로젝트로 특별예산을 확보하면 다른 지자체는 이를 베끼느라 정신이 없다. 이래서야 어떻게 중앙을 상대로 지방의 권한을 찾고 독자적 생존의 길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대구만 해도 철저하게 망해가고 있다. 파산한 금융기관이 70개를 넘고 변변하게 간판을 달고 있는 이렇다할 기업을 제대로 꼽을 수도 없다. 이렇게 지방이 망하는데 나라라고 온전할리 없다.

전문가들은 지방을 살리는 것이 나라 경쟁력을 높이는 유일한 방안이며 그 지름길이 '지방분권'이라고 입을 모은다. 부산시 정책개발실 초의수 연구위원은 "20세기까지가 서울집중, 중앙집권화의 과정이었던만큼 21세기에는 국가가 지방 분권과 분산을 통한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북대 경영학부 서정해 교수는 "지식기반 사회에서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장에서 보듯 지역경제의 기술적 우위가 국가경쟁력으로 귀결되는 만큼 지역기술혁신체제 구축 등을 위한 지방분권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지방분권화의 주체는 오로지 지방일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중앙집중에 익숙해져 있는 서울의 권력자나 정치권에 지방분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를 위해 지방정부, 학계, 경제계, 언론계, 시민단체 등 지방 리더들이 구체적 연구와 실천을 통해 지방분권의 형태를 만들어 내고 이를 운동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북대 정치외교학부 정희석 교수는 "지방분권 추진에는 중앙의 저항이 만만찮을 것"이라며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지방분권 요구와 함께 시민운동적 차원의 지방궐기를 병행해야 다가갈 수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마침 지방분권의 당위성 및 요구가 불을 지피기 시작하는 단계다. 부산시에서는 국토균형개발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으며, (사)대구사회연구소를 비롯 대구, 부산, 광주, 전주 등 4개 지역 연구소는 지방분권과 지역혁신의 공동연구를 해당 지자체에 제안했다. 전국 100개 시민단체는 분권과 자치운동에 이미 돌입했다. 관련 세미나도 늘고 있다.

이러한 분권 움직임은 집중력을 높이고 탄력을 받을 수 있도록 각계의 활발한 연대가 필수적이다.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김태일 교수는 "시도별로 각계가 동참하는 분권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나아가 지역간 연대의 형태를 띨 때 분권운동은 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방이 국가의 중심으로 서는 시대. 이 개벽의 시대는 지방에 삶터를 가진 사람들이 앞장서야 열 수 있다.

최재왕기자 jw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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