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크레용을 낱개로 팔까? 나 어릴적에는 늘 푸른 색깔의 크레용이 부족했었 다. 문방구에서 푸른 색을 사고 또 사던 기억이 난다.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 몰래 책상 사이를 기어다니며 푸른 색깔의 크레용을 빌리려는 아이들이 많았다. 산은 늘 푸르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리기도 쉬웠기 때문이리라. 적당히 초가지붕 같은 둥근 선과 기와지붕 같은 뽀족한 선을 이어가면 늘 보이는 앞산과 뒷산 같은 모습이 드러났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산을 제대로 채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록색을 칠하고 산을 보면, 산은 이미 초록색이 아니었다. 녹색을 덧칠하고 산 을 보면, 산은 녹색도 아니었다. 산 그늘이 진 것 같아 청색을 덧칠하고 나면, 산 은 청색도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 반복하다 보니까 나의 도화지는 엉망이 되고 말 았다. 실망에 젖은 눈으로 산을 바라보니, 그래도 산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에 나름대로 버티고 있었다. 산은 내가 바라보는 순간마다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나갔 던 것이다. 그래도 산은 내가 산을 찾을때 마다 어김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 다.
내가 절망에 빠져 산을 찾을 때에도 내가 자만에 가득차 산을 찾을 때에도, 산은 늘 그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산은 한번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계절마 다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해마다 다른 이야기로 산은 자신을 바꾸어 나가기 때문 이다.
나도 나를 돌아볼 때마다 끊임없이 변모하지 않으면, 나의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일까?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지 않는 자는 세상이 만드는 대로 될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자리에 있지 못하는 자는 늘 남의 자리를 떠돌 아 다닐 뿐이리라.
대구가톨릭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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