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未堂 徐廷柱

입력 2000-12-25 14:00:00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되는 '국화 옆에서'는 널리 애송되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초기시다. 이 시는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누구나 즐겨 암송한다. 일찍이 한국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위치를 굳힌 그는 '소설에 동리(東里), 시에 미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60여년에 걸쳐 시단의 최고봉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대중적 인기도 한 몸에 받았다. 그런 그가 김동리, 황순원에 이어 어제 저녁 '동천(冬天)'으로 떠났다.

올해 들어서도 맥주 두서너 병은 마실 정도로 건강을 유지했던 그는 지난 10월 부인이 먼저 이 세상을 뜨자 몸져 누웠다. 곧 가족이 없는 한국을 떠나 두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주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기력이 극도로 쇠잔해 병원에 입원했다. 최근 폐렴이 악화돼 24일 오전부터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다 밤 11시경 별세, 우리 문단은 광복 이전부터 활동해온 대표적인 문인들을 모두 잃게 됐다.

191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그는 김광균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38년 첫 시집 '화사집'에서 97년 열다섯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에 이르기까지 1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해 '시의 학교' '시의 정부' 등으로 불렸으며, '큰 시인들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으로 출발했던 그는 동양사상과 민족 정조가 어우러진 경지를 일궜다. 이어 토속어의 탁월한 구사, 생명의 근원적.윤회적 탐구와 불교적 세계관 천착, 신화화하는 언어 빚기 등으로 시집마다 독특한 세계를 펴보이면서 '그는 아직도 현재형의 시인이며, 한국시는 본격적인 그 이후의 시대를 개막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몇 가지 행적 때문에 폄하되기도 한다. 일제 말기의 친일시와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5공 시절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 등으로 지탄을 받았으며, 그 자신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고 참회한 바도 있다. 미당 만큼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표현을 확장시킨 시인도, 우리 민족의 정서를 잘 살려낸 시인도 없다. 그의 그런 행적은 '옥에 티'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문학적 업적마저 폄하되지는 않기를 바라며, 삼가 명복을 빈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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