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동선의 중앙아시아이야기-1)

입력 2000-12-19 14:50:00

연말 특집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동포 시리즈를 6, 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한민국 정부 파견 한의사로 만5년간 현지에서 진료활동을 했던 대구의 한의사 김동선(37)씨가 생생한 체험을 집필한다.

김씨는 귀국 후에도 그들을 걱정하고 있을 정도로 현지 동포들에 대한 애정이 특별하다. 또 체류 기간 역시 무려 5년이나 됨으로써 일시 방문하는 취재기자들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깊은 취재를 할 수 있었다.

경산대 한의대·대학원을 졸업하고 1995년 1월부터 지난 2월까지 현지 병원에서 봉사했으며, 현재는 대구 허병원 한방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편집자

카자흐 공화국의 깝차가이 공동묘지. 고인의 초상을 품위 있게 그려 넣은 화려한 비석들 사이에 초라한 함석 묘비가 하나 서 있다. '석 니꼴라이'. 애써 찾지 않는다면 거기 무덤이 있는 줄 조차 알기 힘들 구석진 자리. 하와이 여기저기 공동묘지서 발에 채이며 나뒹구는 우리 교포들의 비석을 연상시키는 풍경이다.

그의 한국 이름은 석도인. 필자가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정부 파견으로 현지 알마아타 시에 부임한 직후였다. 진료실을 들어서는 늙고 병든 얼굴, 남루한 옷차림, 먼 곳을 찾아 헤매는 눈… 그리고 고향 떠난지 50년이나 됐다지만 그의 말에는 경상도 말투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당시 72살.

"고향이 어디십니까?" "경남 합천군 ○○면 버르실 마을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결국 두 사람에게 영원히 아픈 상처만 더하는 계기가 돼 버렸다.석씨가 고향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 것은 1943년. 살얼음 위를 걷듯 하던 석씨 집안에도 징용 영장이 날아 들었다. 징용 대상자는 이미 가정을 이뤘던 그의 형님. 집안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다. 석씨가 형 대신 가기로 했다. 누구도 피할 수는 없는 운명.

"건강하게 다녀 오너라" "꼭 살아 돌아 오겠습니다". 젖은 눈으로 두 손을 마주 잡았지만, 그것은 마지막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먼 길 동안 트럭과 기차를 번갈아 탔다.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 도착한 곳은 일제가 전쟁물자를 캐내던 사할린이었다. 위태롭고 고된 부역, 굶주림, 공습… 함께 끌려 갔던 많은 동료들이 맥없이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는 살아 남아야 했다.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과 형님, 어린 조카들, 맑은 강물이 흐르고 새들이 노래하는 고향을 못보고 어떻게 여기서 영혼을 접을 수야… 그리고 역시 그가 옳았다. 1945년, 드디어 일본은 패망했다. 그에게 남은 일은 이제 고향 땅을 다시 밟는 것 뿐이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으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는 다시 이리 저리 밀리기 시작했다. 방향도 고향과는 반대쪽이었다. 사할린에서 끌어 내어진 그는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들어본 일도 없는 카자흐스탄까지 쫓겨나고 말았다. 끝 없는 사막과 푸른 초원, 낯선 얼굴들,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 그에게 고향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 돼 가고 있었다. 그도 그걸 받아 들일 참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또 달라졌다. 체념하고 살아 오던 그가 다시 고향을 꿈꾸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철권 통치의 소련이 붕괴되고 그 산하에 있던 여러 공화국들이 속속 독립 하면서부터였다. 단 한번도 잊은 적 없던 고국 대한민국의 대사관이 중앙아로 진출했다. 한국 기업들도 잇따라 들어왔다. 깔끔한 복장의 한국인들이 멀리 보이기라도 하는 날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길이 열리겠구나! 쉽잖을 줄이야 알았지만, 당장에라도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으리라 기대 부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 직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다녔다. 역시 간단찮았다. 어쩌면 그 회사원에게는 당초부터 무리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

석 니꼴라이씨가 필자의 한방병원을 찾은 것은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 다음해(1996년) 가을, 필자는 출장차 귀국할 일도 있었다. 필자는 곧바로 경남 합천을 찾았다. 면사무소 원적 조회와 수소문 끝에 석니꼴라이의 고향을 찾아 냈다. 그의 부모님과 형님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의 조카들은 부산에 살고 있다고 했다.

부산으로 연락했다. 이제 일이 다 된거나 마찬가지야! 필자가 더 들떴다. 조카들을 설득해 석씨를 초청토록 절차를 진행시켰다. 다시 알마아타로 돌아가 이런 얘기를 전했더니, 그는 73살 나이 답잖게 껑충껑충 뛰며 기뻐했다. 죽어 고향 산천 부모님 곁에 묻힐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그는 충분히 들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초조하게 귀국 날짜를 기다리던 그에게 잔인한 운명은 또다시 행패를 부렸다. 한국의 조카들이 초청을 다음 기회로 미뤘다. 사실상의 초청 거부.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만, 통보 받은 석씨는 주저앉아 오랫동안 서럽고 절망스레 흐느껴 울었다.

그 모진 세월에도 연약한 목숨을 버티게 해 왔던 그리움과 가냘픈 희망, 그것이 몸으로부터 빠져 나간다는 것은 살아갈 의욕를 잃어버리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일제 징용 영장을 받아 쥐던 날에도, 도무지 이름 모를 낯선 땅 카자흐에 버려지던 순간에도 그처럼 낙담하지 않았었다고 했다. 조카들의 초청 거부라니! 배신감이 더 힘들게 한 것일까?

도무지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필자가 이번엔 합천군수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각계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도 오랜 시일이 흘렀다. 드디어 1997년 5월5일, 초청장이 필자에게로 전해져 왔다. 시간이 없었다. 거머쥐고는 곧바로 석씨 집으로 마구 뛰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은 석 니꼴라이가 또하나의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었다. 소설 처럼, 거짓말 처럼, 그는 한국에서 초청장이 도착하던 바로 그날 그 한 많은 세상과 영원히 이별하고 있었다.

그날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눈물마저 금세 말라버리는 광활한 스텝 지역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비. 초라한 석씨의 함석 묘비 위로 눈물처럼 흘러 내렸다. 눈물 따위는 진작에 말라버렸다고 믿어온 필자의 눈에도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들여다 본 초청장, 그것은 이미 몇달 전에 발송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 한많은 한민족의 비애라 가슴이나 두드리는 게 필자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카자흐는 어떤곳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의 넓은 초원 국가. 끝없이 펼쳐진 키작은 풀들의 스텝 들판에서 소·말·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동남으로 만년설을 인 해발 5000m의 톈산 산맥이 있다. 그 너머가 중국. 북으로는 러시아와 접해 있다.

알마아타를 병풍처럼 둘러 싼 톈산산맥의 만년설은 일년 내내 녹아 여름에도 차가운 시냇물을 흘려 내린다. 이 물은 카자흐의 마른 스텝을 적시고 초원에 기대어 사는 사람과 동물의 목을 적셔 준다.

국토의 대부분은 구릉이 많은 평원과 고원이며, 나머지는 산지이다. 계절변화가 뚜렷한 대륙성기후로, 북부지방의 겨울 평균기온은 -18℃ 전후, 남부는 -2℃ 내외로 춥다. 여름은 북부와 남부에 걸쳐 20℃~30℃ 내외로 더운 편.

전국적으로 연평균 300mm 내외의 적은 비가 내리고 사막지역 강수량은 100mm 미만이다. 나무 숲을 찾아보기 힘들며, 스텝에는 큰사슴 등 수많은 포유류가 산다. 산악지대에서는 여우·곰, 흰 표범이 발견된다.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유목생활을 해 왔지만, 지금은 전통 생활방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농지 중 25%는 경작지이고 75%는 목초지. 오늘날 경제에는 광업·채석업이 큰 몫을 차지한다.

1850년대에 카자흐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 지배 아래 들어갔고, 1936년에 카자흐 공화국이 성립됐다. 한국과는 1992년 4월 외교관계를 맺었다. 면적은 남한의 30여배, 인구는 절반 이하. 현재 교민 수는 10만3천300여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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