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 이탈리아 (4)쇼핑천국 밀라노

입력 2000-12-18 14:07:00

"아! 한국인이네요. 혹시 아르마니 매장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밀라노 중심가에서 동행과 우리말로 얘기 나누는 기자를 본 한국인 남성들이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현지 사람들에게 몇번이나 물어 봤지만, 말이 잘 안통해 도무지 그 매장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밀라노 전시회 참관차 왔다가 유명한 아르마니 옷이나 한벌 사갈까 해서요". 서울의 회사에 다닌다는 이들은 시간이 별로 없다며 기자가 알려준 방향으로 종종 걸음을 쳤다.

코.입술.눈썹 등에 피어싱을 한 젊은이들로 가득한 세계 패션의 중심 밀라노. 구찌.프라다.미쏘니.발렌티노 등 이탈리아 명품 매장들이 즐비한 이 도시에선 두 손에 고급 브랜드 쇼핑백을 두세개씩 들고 다니는 관광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은 최고의 고객이었다. 수백만원씩 되는 비싼 가격 때문에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 고급 매장도 어디서나 일본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화려한 장식과 함께 전시된 옷.가방.구두와 0이 수도 없이 붙은 가격표를 정신없이 쳐다 보다가 구경이나 하자 싶어 '프라다' 매장에 들어 섰다. 멋있게 생긴 남자 직원이 간사해 보일 정도로 표정을 관리해 가며 인사했다. "곤니찌와!"

기자를 일본인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우리도 쉽잖은 두 나라 사람 구분을 그에게 요구하는 거야 무리이겠지만, 기분은 영 찜찜했다. 실제로 매장 안에선 일본 여성 서너명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유명 메이커 제품을 좋아하기로 소문난 일본 관광객들의 '명품 사냥'은 현지인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었다.

돈 값어치가 일본 것의 10분의 1 정도 밖에 안되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 대열에 일부 끼어 있었다. 누구나 인정해 주는 명품들을 우리 국내 판매 가격의 절반 정도에 살 수 있으니 욕심이 생길 법도 한 일이겠지만, 흥청망청 수천만원 어치씩 명품을 사모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한국인 부자들은 정말 곤란해 보였다.

하지만 기자도 그곳의 쇼핑 분위기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핑 거리 곳곳이 이탈리아 특유의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수백년 역사를 지닌 고풍스런 건물들, 거리의 예술가들과 어우러진 패션 매장의 쇼윈도들…. 굳이 욕심 일으키는 명품들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이자 볼거리였다.

밀라노의 화려한 쇼핑 거리들은 묘하게도 중심부 두오모 성당을 기점으로 뻗어 있었다. 수백개 첨탑이 하늘 찌를 듯 솟은 고딕 건축의 대걸작, 두오모 성당은 이탈리아 문화를 끔찍이 사랑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에 의해 19세기 초 정면 부분이 완성됐다고 했다. 이 대단한 문화재와 리나센테 백화점이 불과 100m 거리 안에 공존하고 있었지만,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 건물 사이에선 작업복 차림의 한 여류화가가 거리 바닥에 대형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백화점 앞에선 한 기타 연주자가 감미로운 선율로 '산타루치아'를 연주,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성당 주변으로 고급 부띠끄가 모여 있는 몬테 나폴레오네, 산 안드레아, 델라 스피가 거리 등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발산하며 행인들로 하여금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내를 맡았던 변호사 로베르토 트로바토씨는 쇼윈도의 가격표를 보며 영어로 "테러블"(끔찍하다)을 연발했다. "이곳에서도 부자가 아니면 사기 힘든 물건들입니다". 가게 중에는 값비싸다는 뜻의 '익스펜시브'라는 간판을 건 것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트로바토씨는 변호사가 맞는지 의심 갈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마리엘라 부라니' '안토니오 푸스코' '로베르토 카발리' 등 명품 거리에 당당히 자리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매장을 소개할 때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디자이너에겐 아이디어가 중요하지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 말이 아니고 이곳 분위기이지요".

한국에서와 달리 그곳에선 백화점 대신 거리 매장들이 발달해 있는게 특이했다. 독특한 인테리어로 현대 미술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고급 부띠끄에서부터, 디자인이 훌륭하면서도 값싼 제품들을 모아 놓은 편집매장에 이르기까지, 개성 다양한 거리 매장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 유일의 백화점 리나센테도 몇천원 하는 값싼 스카프에서부터 수백만원대 명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을 구비해 쇼핑하기가 편리했다.

밀라노 컬렉션 등 패션 행사가 열릴 때면 세계 각국 패션 관계자들까지 쇼핑에 몰려 나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북적인다는 밀라노. 장사가 저절로 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패션 디자이너 파올로 파가니씨는 이 도시의 매력을 거듭거듭 강조했다. "유서깊은 문화유산의 바탕 위에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최신 유행이 살아있기 때문에 전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