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달밤의 보리타작

입력 2000-12-12 14:17:00

사려깊은 신의 손길처럼 뜨락에 달빛이 드리웠다. 낙엽위에도 마른가지에도 아낌없이.

저 달은 나 어릴 적 고향집 거름더미를 비추던 그 달이다.

대보름이던가? 우리는 며칠전부터 수수깡으로 곡식이며 과일나무를 예쁘게 만들었다. 수수깡 껍질을 골골이 벗기면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여러 모양으로 자르고 켜낸 속살에 수수깡 껍질을 이리저리 꼽아서, 보리삭도 만들고 콩줄기도 만들었다. 수수깡을 제법 거창하게 연결시키면 감나무도 되고 대추나무도 되었다. 누가 많이 만들었나 연신 세어가며, 누가 잘 만들었나 연신 우겨대며 온갖 정성을 쏟았다. 밤이 깊어가고 끼가 발동하면 마차며 자동차까지 만들었다. 특히 수수깡 안경은 그 땐 거의 본 적도 없는 금테 안경과 같아 보였다. 그걸 끼고 책을 읽으면 제법 학자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이렇게 밤새 만든 곡식을 마당 한쪽의 거름더미에 꽂아놓았다. 보름달이 뜨면 아이들과 도리깨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타작을 했다. 밤새워 공들인 정성에 한이라도 맺힌 듯 우리는 신나게 타작했다.

사실 어른들에게는 대보름의 보리타작이 올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풍습이었겠지만, 아이들에게는 밤을 지샌 정성을 순식간에 타작하는 짜릿한 놀이였다. 어제 밤 가장 화려했던 보리도, 물들여 만든 대추나무도, 도리깨에 닿으면 박살이 났지만 그것을 아쉬워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서로 예쁜 것을 타작하려고 기를 쓰고 덤볐다. 어제의 작품들이 달빛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야릇한 통쾌함 때문이었으리라.

오늘 그 달빛 아래 다시 서니, 이제야 인생의 풍년도 지극한 정성과 신나는 타작이 빚어내는 오묘한 결실이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겁다.

신창석(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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