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구중궁궐 대통령

입력 2000-12-12 00:00:00

조선조가 노론, 소론, 동인, 서인 등 심각한 당쟁(黨爭)에서도 500여년이나 존속할수 있었던 요인은 '활발한 언론'에서 찾는다. 막히지 않는 언로(言路)와 목숨을 내건 간쟁(諫諍)은 민심이반(離反)을 불러올 수 있는 절대왕권의 폐해를 해소하는 청량제(淸凉劑)여서 조선왕조 유지의 버팀목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면전에서 그것도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에 왕권을 견제하는 선비들의 언어는 지금에 와서도 숙연할 정도였다. 따라서 조선은 건강한 사회였다.

조선조에서 삼사(三司)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대관(臺官)은 시정풍속을 교정.규찰하는 일을 맡았다. 사간원 간관(諫官)은 간쟁을 주로 했으며 홍문관은 학술기관이다. 이 '언론삼사'가 왕권의 일방통행 저지를 위해 함께 뭉친 사회가 조선조의 특징이다. 예문관 소속의 하급관료인 사관(史官)까지 가세한 만큼이나 왕과의 마찰로 인한 언론의 한때 위축은 있었어도 곧 평상으로 돌아오는 탄력성을 가진 왕조였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중 비판에 가장 너그러웠다는 성종때도 연평균 40명이 넘는 대간들이 인사조치될 정도였다는 통계이고 보면 활발한 언론의 지수를 나타낸다.

언로가 국정(國政)의 중요요소라는 인식을 뚜렷하게 한 정치인으로 역시 조선시대의 조광조(趙光祖)를 꼽는다. 그가 중종에게 상소문을 올린다. '말의 길이 열리느냐 막히느냐 그것이 국가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이 열리면 편안함이 있고 막히면 망하나니…(言路之通塞 最關於國家 通則治安 塞則難亡…)라고 했다. 어진 임금의 길도 제시하고 있다. '결정을 내릴때는 널리 물어서 하고(博詢埰納), 토의에서는 널리 의견을 들어서 수렴한다(廣聞收議)' 한마디로 정치는 언로의 활성화에 있다는 것이다. 조광조는 그때 이미 이런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을 세운 선각자로 볼만하다.

현직 공무원이 김대중 대통령을 '구중궁궐에 갇힌 외로운 늙은이'로 표현한 것은 언로가 막힌, 직간하는 측근이 없다는 상황의 설정 위에서 한 쓴소리로 볼수 있다. '국정이 그릇된지 오래이며 민심은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져 각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주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한 바가 크고 측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인의 장막'을 과연 걷어낼 것인가, 대통령의 결단도 기대되는 대목이다. '천자는 쟁신(諍臣) 7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無道)하더라도 그 천하는 잃지 않고, 제후가 쟁신 5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는다'는 말이 새삼스러운 게 요즘의 한국 정치가 아닌가.

최종진 논설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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