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산에 올랐던 것은 경북지역 최고봉(最高峰.1,219m)의 웅려함을 보자함도 아니요 그럭저럭 산세를 즐기려 가벼운 걸음으로 나서는 주말산행은 더욱 아니었다.차리리 경외심으로 느껴지는 이곳 주민들의 산 사랑과 의지함은 무엇 때문이며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였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주말이면 무조건 산을 헤맸다. 골짝 구석구석을 샅샅이 누비고 하산길에는 어김없이 주민을 찾아 산의 내력을 물었다. 각종 참고문헌도 열심히 뒤졌다.
그런 과정에서 가닥을 잡은 사실은 일월산과 주민들 삶의 궤적과의 유리될 수 없는 인문.역사성이었다. 주민 생활사 한가운데는 일월산이 있었다. 또 그것은 근세 이후 우리역사와도 항상 맞물려 돌아갔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 산행 내내 우리에게 가장 힘있게 다가온 것은 무속의 기운이었습니다. 골짝마다 무속인 뿐만 아니라 영험을 좇는 민초들이 기도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지난 3월 살얼음이 겨우 풀린 선녀탕에서 무당 한사람이 치성전 의례로 알몸 세신을 하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일월산을 찾는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음기가 충만한 산이기 때문일까. 무슨 한이 있기에 저토록 기도에 정성을 다할까. 황씨부인당을 찾는 많은 여인들도 황씨부인처럼 초야에 소박 받았을까.
▷남존여비, 여필종부 등 온갖 성차별이 난무했던 조선조에는 여성들이 한을 풀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무슨 상담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야밤에 보쌈해 가도 탈이 없던 시대였지요.
유일하게 여성의 지위가 인정되던 것이 바로 무속인이었습니다. 남자와 똑같이 갓을 쓰고 삼지창에 벼슬아치의 옷을 입고 마구 사람을 호령할 수 있는 무당. 여성 암흑기때 한많은 여인들은 남성상위 세습에 반발, 접신의 능력을 갖는 무당이 되고자 했고 그런 기가 이어져 일월산을 찾게 된것은 아닐까요.
▷무속의 성산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무속인들은 접신을 위해, 민초들은 영험에 의지하기 위해 사시사철 일월산을 찾고 있었습니다.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영양군의 일월산 무속을 테마로한 각종 개발논의가 본격화됐지요. 지난 8월에는 무속타운 건립과 국제토템페스티벌 개최 계획이 수립되고, 10월에는 대규모 굿경연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일월산에는 일제 수탈사의 생채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용화리의 거대한 제련장은 광물 수탈의 규모가 엄청났음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일제는 여기 뿐만 아니라 인근 봉화 춘양, 서벽 일대에서도 금, 구리 등 주요광물을 닥치는 대로 캐내 전쟁물자로 조달했던 것입니다. 이 결과 이 주변에는 광물자원이 고갈 됐지요
산림자원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아름드리 적송, 궁궐을 지을때 사용 했던 황장목이 군락을 이뤘던 때도 있었지만 일제가 갱목과 건축자재로 대대적인 벌채를 하면서 남벌이 시작된것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국유림 영림계획 등의 미명으로 또다시 우량목이 잘려나가 이제는 민둥산이 되다시피 한 모습입니다.
일월산 나무는 지속적으로 베어지기만 하고 심고 가꾸기를 소홀히 해 굴참나무, 상수리, 물푸레 등으로 뒤덮이는 천이현상이 진행되고 있어 지금이라도 체계적인 육림계획이 수립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일제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났던 일월산 의병사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비록 수적 열세 등으로 일제에 패퇴했지만 이후 만주에서 이어진 독립운동의 인적,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국운을 회복하고자 했던 민족정신의 표상으로 기려져야 할것입니다.
시리즈가 끝날 무렵 대구에 계시는 홍태석 역사편찬위원회 명예위원과 장래정 독립운동가유족중앙회 고문 등 네분의 80대 독자께서 북부지역본부를 방문해 우리가 미처 다루지 못했던 일월산 의병사 관계자료를 한아름 건네고 후일 기사화 해줄것을 당부 하셨습니다. 관심과 호의에 감사할 따름 입니다.
▷취재기간 가장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일월산 자락에서 운명처럼 살아가는 산촌민들이었습니다. 일제와 해방후 좌.우익 사상대립, 한국전란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특히 빨치산들로 인한 산촌민들의 피해는 처절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빨치산과 군경 사이를 곡예하듯 옮겨다니며 협조하다 그것이 빌미가 돼 양쪽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거나 산촌에서 내쫓기는 부초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념과 사상대립의 소용돌이 속에 월북 또는 피랍 되거나 희생된 양민들의 숨겨진 이야기는 마침 취재 당시 남북이산가족 상봉의 자리가 마련된 것을 계기로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남북 화합과 협력의 시대를 맞아 이제는 분단의 멍에를 벗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때가 되었다는 기대감과 염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렵게 구한 일월산 한국표범 사진이 공개됐을때 그동안 생존여부를 두고 논란을 빚은 한국 호랑이와 표범에 대해 독자들로부터 높은 관심을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보도후 한동안 영천, 예천, 문경, 영주 등지에서 맹수로 보이는 대형 발자국을 목격한 주민들의 제보가 줄을 이었지요.
일제가 해수구제라는 명목으로 전국에서 수백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 낸 것은 호피를 탐한 것도 있지만 우리 민간신앙의 대표적 상징을 제거,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는 시실을 알고 분한 마음을 떨칠 수 가 없었습니다.
▷일월산을 발원지로 하는 하천에는 그대로 떠마셔도 좋을 만큼의 청정옥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살아 숨쉬는 자연, 바로 그대로 였지요. 약간의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도 수질보존이 가능하고 이를 천혜의 관광자원으로 가꿀 수 있다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조지훈과 오일도, 이병각.이문열로 이어지는 영양문학가의 계보는 한국 현대문학의 동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일월산과 고향의 정서를 저반에 두고 작품활동을 한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일월산은 영양사람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일월산을 오르면서 가장 짜증스러웠던 것은 각종 시설을 비롯해 산 곳곳을 잘라놓은 도로 였습니다. 무속인들의 마구잡이식 기도처 조성으로 산의 훼손이 가속되는 점도 그렇고요. 이로인해 산정의 정형을 회복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보존과 개발책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시리즈를 소재별로 나눠 심도 있고 알찬내용을 담아내려 했지만 자료와 기획취재력 부족 등으로 졸문이 되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그저 처음으로 일월산 전체를 표피적으로 나마 들춰냈다는 것을 위안으로 여깁니다.
예상치 못했던 독자들의 관심과 격려는 물론 물심양면으로 지원과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안동정보대학과 영양군청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