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산(23)-문인들의 발자취

입력 2000-11-15 14:13:00

일월산 용화리 천화사. 공양 지을 물을 길으려고 우물가에 나온 여승들의 뽀얀 입김에서 산사의 겨울을 느낀다. 곡간에 콩가마를 재고 땔나무를 옮겨 나르며 겨울채비를 서두른다. 여승들이 신은, 촌티 덕지덕지 나는 고동색 털고무신이 그렇게 따뜻해 보일 수가 없다. 인근 계곡에는 새벽 찬바람이 벌써 몇겹의 살얼음을 만들어 놓았다.

일월산 봉우리와 골짜기, 고개 곳곳에 풍류객들이 남긴 한시(漢詩)로 가득하다. 조선중기 선비였던 일초(一樵) 이제만(李濟萬)은 일월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일월산구곡'이라는 한시를 찰당골 바위에 새겨 후손에 전했다.

지금도 향토시인 한사람은 '내마음 반만 베어 일월산에 맡겨두고/ 달도 보고 해도 보고 때로는 산채캐고/ 저만치 욕심버리면 만사무강 할 것 같다'고 노래한다. 일월산 자체를 시(詩) 삼아 그속에 자신을 묻기도 하고 때로는 웅지를 토했다. 이러한 일련의 정서를 간직하며 문학세계를 열어갔던 영양의 문인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일생을 문학사조의 변방에서 고독을 노래했던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1901∼1946), 요절한 천재 시인 세림(世林) 조동진(趙東振.1917∼1937), 시를 통해 인간의식과 우주의식의 일치를 체험키 위해 언제나 영혼의 기갈을 노래했던 청록파 시인 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1920∼1968).

일행은 이들 문인들이 읊은 순수 서정시와 나라를 잃고 외세로부터 우리 문학정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그들의 발자취를 좇았다.

찰당골을 내려와 청기초등학교 당리분교에서 수돗물 몇모금으로 마른 목을 축인후 당동재 굽이길을 넘어 10여분 남짓해 도착한 주곡마을. 야트막한 산자락에 의지한 수십채의 전통가옥이 들어서 있다.

초입에서 호은종택(壺隱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을 맞는다. 한국근대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조지훈과 그의 형 조세림이 태어난 생가다. 입구 (口)자형 측.정면 7칸으로 정자형식의 사랑채와 조지훈 시인 태실(胎室)이 그대로다. 조선중기 인조조에 입향조인 조전의 둘째 아들 정형(廷珩)이 창건했다.

여느 농가와 마찬가지로 가을걷이를 끝낸 벼 가마니들이 행랑채 마루를 가득 메우고 있다. 생가 입구 표지판 아래 한국문인협회가 마련한 현대문학 표징 동판이 눈에 띈다. 영양문인협회 관계자는 그가 시를 통해 얻고자 했던 물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조지훈선생의 시 속에는 언제나 파괴된 균형과 질서를 복구하고자 고뇌했던 영혼의 기갈(飢渴)이 나타나 있고 해방직후 혼미했던 사회에 대한 계몽과 시대적 소명감의 조급함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조지훈은 1920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시문에 능했던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형 세림이 조직한 '꽃탑회'에 참가, 마을 소년문집을 만드는 등 유년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6세때 영양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선후배들과 마을 안에 있는 월록서당(月麓書堂)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월록서당 관리인 조동길(71)씨는 "지훈선생이 정규교육을 받은 것은 보통학교 3년이 전부였으며 이 때문에 느꼈던 지적 목마름은 엄청난 독서로 나타났다"고 회고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아버지 조헌영(趙憲泳)은 일찍이 이들 형제에게 신학문을 전달하고 보들레르.와일드.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을 접합케 해 사회를 보는 눈과 시 세계를 경험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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