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산의 가을이 저만치 달아나려 하고 있다. 단풍이 연출한 오색향연의 시간은 이렇게도 짧게 스쳐 지나가는가. 산정은 이미 희끗한 갈색으로 바뀌고 한잎 두잎 낙엽이 내린다. 아침 산행에서 맞는 골바람이 옷깃을 스며 한기를 느끼게 한다.우리 일행은 일월산의 골짝과 능선을 숱하게 오르면서 '일월산에는 고찰이 왜 없을까'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통일신라시대때 찬란했던 불교의 흔적은 영양의 지천에 널려있고 하물며 영산이라 불리는 일월산이라면 천년 고찰은 아니더라도 볼품 있는 번듯한 사찰 하나쯤은 있어야 당연한게 아닌가.
그러나 일월산 자락의 사찰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작해야 암자나 굿당, 기도처가 대부분 사찰행세를 하고 있는 꼴이다. 왜 일까. 가을 끝자락에서 우리 일행은 수개월 동안 의문을 남겼던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영양지역에 흩어진 통일신라시대 천년고찰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지금으로부터 1천200여년전. 불교가 국교가 되고 사람사는 곳이면 어김없이 사찰이 들어섰던 통일신라시대는 그야말로 불교의 극성기였다. 이때 조성된 사찰들은 대부분 중생들이 억겁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던 생활현장에 터를 잡았다. 말그대로 '평지가람'이다.
일월산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작은 고을 영양지역에도 그당시 불교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돼 있다.
영양군 입압면 산해리 속칭 봉감마을 한켠에 우뚝 선 탑. 국보 187호인 '봉감모전 5층 석탑'이다. 모전탑으로는 전국에서 제일 큰 높이 11.3m 기단폭 3.34m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으며 정교함이 빼어나 당시 불교건축의 발달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탑의 상륜부에 세운 보륜(寶輪)과 보개(寶蓋) 등 장식물을 지탱하는 기둥이 목주(木住)라는 점에서 인도불교 유입 초기의 목탑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영양읍 현리에 흩어진 석탑들과 당간지주는 가람의 규모가 엄청났음을 말해주고 있다. 영양읍 삼지리 모전 3층석탑과 화천리 3층석탑, 일월면 용화리 3층석탑 등은 마을전체가 가람이었으리라 짐작케 할 정도다.
한때 그 세력이 엄청났던 영양불교.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영양불교는 기나긴 단절의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은 탑과 당간지주 등을 흔적으로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사서에도 이상하리 만큼 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찰은 아예 건축된 흔적도 없다. 수백년간의 명맥이 끊긴것이다. 향토사가들은 그원인을 조선조의 숭유억불정책과 지역적인 여건, 주민들의 신앙구조 등에서 찾는다.
국가적지원을 받고 극성한 영양지역의 통일신라불교는 고려시대중기까지도 그 모습대로 명맥을 이었으나 이후 각종 전란 등으로 사찰이 소실되고 당시 사찰이 '산중가람'화하는 추세에 들지만 국가적지원이 점차 떨어지는 상황에서 지역의 취약한 경제기반 등이 원인이 되어 새로운 불사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 쇠락의 길로 접어든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불교도입 초기 정통불교와 민간의 무속신앙이 혼합된 형태가 여전히 지속되면서 불교이상으로 민간신앙에 심취한 주민들의 신앙구조가 구태여 쇠잔해가는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필요성을 갖지 못했고 특히 일월산은 그같은 민간신앙의 중심을 형성했던 터라 새로운 불사 등을 통한 불교의 착근이 더욱 쉽지 않았으리라는 판단이다.
이같은 사실은 취재를 시작하면서 일월산 주민들에게 전해 들은 "일월산에는 황씨부인이 주신이여서 부처님을 모시지 못한다"는 속설에도 깊이 배어 있었다.
부처님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일월산에 터잡은 10여개 사찰의 최고(最古)역사라야 구한말 정도다. 대부분이 생긴지 40, 50년 안팎이다. 그중 유명하다는 용화사와 천문사, 선녀암 등은 풍수가들이 일월산 음기(陰氣)와 영기(靈氣)가 가장 강한곳으로 지목하는 일월면 용화리 선녀골 일대에 집중돼 있다.
마침 이곳을 찾았을때 주차장에서는 전국 무속인들이 참가해 벌이는 '팔도굿 경연대회'가 한창이었다. 형형색색의 깃발을 꽂아 놓고 꽹과리의 요란한 장단에 맞춰 무속인들이 신을 불러들이고 있다.
일월의 불교를 찾아 들어선 걸음에 마주친 거나한 굿판. 어색하게 멀뚱멀뚱 거리다 대구 무속인 김선경(44)씨가 거드는 말에 정신을 차린다. "일월산의 사찰들은 대부분 강한 무속의 기를 갖는데 그렇지 않으면 절이 허물어집니다".
사실일까. 굿판을 뒤로하고 선녀골 입구에서 좌측으로 거르게난 산길을 따라 용화사로 들어섰다. 용화사의 본전(本殿)은 석가모니를 모셨지만 대웅전 옆 요사채를 돌자 산령각과 용신각, 황씨부인당 건물이 들어서 있다. 무불습합(巫佛習合)의 단면이 역력했다.
법인 주지스님은 "용화사를 찾는 보살 대부분이 무속인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기 보단 황씨부인당이나 계곡에 마련된 용신 기도처를 주로 찾는다"고 스스럼없이 밝힌다. 자신도 10여년전 중병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이곳 기도를 통해 완치됐다고 한다. 무속의 기운을 스스로 믿고 있는 불제자였다.
속설이 증명된 것이다. 무불습합으로 어느 정도 무속을 인정하는 게 불교계의 배려지만 이곳에는 무속의 기운이 부처님의 불법보다 앞서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불과 5분거리에 넓게 터를 잡은 천문사. 사찰입구에 들어서면서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찰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건물배치를 알리는 표지판에는 '황씨부인당' '산신각' '천제단' '용왕단' '토굴허궁기도처' 등 온통 무속의 기운 뿐이었다.
본전도 황씨부인의 전신상을 모신 건물이 차지하고 있다. 이름만은 '천하대불(天下大佛)'이었다. 황씨부인을 천하대불로, 부처님화시켜 놓은 것이다. 부처님 없는 사찰이었다.
일월산 정상의 일월사도 역시 부처님을 모시지 않는다. 일월산 일대에 퍼져있는 황씨부인의 영험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일월무속의 본당으로 유명할 뿐이다. 이처럼 일월산의 사찰들은 정통불교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역설적으로 일월산주민들의 신앙구조는 전통적인 무속을 바탕으로 수백년전부터 근세까지 견지돼 왔으며 일월산은 그같은 범주에서 영산(靈山)화 돼 정통불교 도입의 필요성도 없었고 설자리도 없었다는 것이다.
민간불교와 신앙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는 영양군청 이영우(45)민원계장의 견해는 이를 뒷받침한다. "불교에서는 믿음의 대상보다 행위를 중요시하며 중생들은 저마다 신성과 자성을 가지고 참진리를 얻기 위해 다양한 신앙대상을 찾고 있고 일월산은 천신줄이 강해 일시적으로 무속적 기운이 득세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종교들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사라지고 생겨나기를 거듭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은 그 뿌리(정통성)라는 것이다. 일월산에 자리 잡았거나 속속 터를 닦고 있는 사찰들은 일시적이거나 단편적인 무기(巫氣)를 따르는 변이적인 것으로 언젠가는 사라지거나 완전한 독자적 형태를 갖추게 되고 연후에 정통불교는 다시 등장한다는 논리다.
그런 정도로 일월산 불교에 대한 궁금증을 덜 수밖에 없는 답답함이 하산길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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