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호 세상읽기-바른정치

입력 2000-10-24 00:00:00

매일신문을 통해서 이곳 서울에서도 대구와 영남 시민들의 생활에 자주 접하게 되고, 그곳의 특수성에 대해서도 제법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곳 경제가 고사직전이라는 비명과 함께 지역적으로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그곳 사람들의 불평이 이곳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가끔씩은 지역감정이 끼인 소리도 들려온다. 이것이 엄살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10여 년 전에는 대구에 자주 들린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느껴지던 그곳 사람들의 크고 우렁차던 목소리도 이제는 훨씬 작게 들리고 이들의 호기도 한물 간 것도 같다. 나의 착각이나 생각이 모자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니 이점에 있어서 모쪼록 오해 없기를 바란다.

도대체 우리 역사에서 영호남의 갈등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떤 이는 아득한 삼국시대부터라고 하는데, 알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 '왕조실록'에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 보인다.

효종 조에 호남지방에 재해 때문에 큰 흉년이 든 적이 있었다. 임금은 이것이 걱정되어 재해 입은 백성을 구황(救荒)할 대책을 강구했는가를 하문했다. 해마다 보릿고개에 호남지방에서 특히 굶어죽는 백성이 많아서 그들을 구휼할 방도로 늘 고심했는데, 이번에는 흉년까지 겹쳤으니 임금의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의정 심지원이 아뢴다.

"통영에 있는 벼 5천 조(租)를 흉년이 가장 심하게 든 고을에 옮겨다 주었습니다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니 5천 조를 더 지급해서 구제함이 어떠하겠습니까?"임금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이에 영의정은 다시 아뢴다.

"영(嶺) 기슭에 있는 아홉 고을에서 세미(歲米)를 쌀 대신에 무명으로 받기를 요청하는 감사의 장계가 있었습니다. 이를 허락함이 어떠하올지요?"임금은 호조판서를 돌아다본다.

"무명으로 대신 받아들이는 것을 호조에서는 허락할 수 있겠는가?"

"아홉 고을에 모두 그렇게 허락한다면 국가의 경비가 염려스럽습니다"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이에 효종은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내린다.

"호조에서는 국가의 재정이 염려된다고 하나 진휼하는 일은 마땅히 고르게 해야 할 것이오. 양호 지방 백성에게는 부세를 경감해 주었는데 영 기슭 고을로 흉년 든 곳에 무명으로 세미를 대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곳 사람들이 자신들만 유독 혜택을 입지 못한다 할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두 곳 백성은 서로 조정의 혜택이 고르지 않다고 늘 불평하지 않았던고? 그러므로 올해의 세미는 무명으로 대신 받아들이도록 허락해 주고 우선 남한산성에 있는 쌀을 꾸어서 쓰도록 하오. 그리고 영 고을의 전세(田稅)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상환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장면으로 미루어 그 때도 영남과 호남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금은 이런 말로 스스로를 달랜다.

"백성이 굶어 죽는다면 국고에 천만 석의 저축이 있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겠는가. 백성은 어리석은듯 하지만 실로 신통하니 틀림없이 조정에서 염려하고 보살피는 뜻을 알 것이로다"

나라의 힘은 넘치나 백성이 굶주리면 바른 정치가 아니다. 다스리는 사람의 힘이 백성의 힘을 능가하면 바른 정치가 아니다. 한 쪽에서는 넘쳐나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바른 정치가 아니다. 다스리는 사람의 영광은 겹치나 백성은 모멸감을 느끼면 바른 정치가 아니다. 다스리는 쪽은 살이 찌나 백성은 가난하다면 바른 정치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백성을 번거롭게 한다면 이것 또한 바른 정치가 아니다.

한양대교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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