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산 산정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도도한 짙푸름을 드리웠던 굴참나무 가지가지에 무서리가 내리기 열흘, 초록은 어느새 수줍은 새색시의 뺨처럼 불그스레 곱게 물든다. 바위틈새 뿌리내린 당단풍나무도 선홍의 잎을 지어 화답한다. 일교차가 심한 일월의 단풍은 진홍빛이 더해 서럽도록 아름답다.
잔설이 훈풍에 녹아 내리던 4월 부터 우리 일행은 일월산의 산나물과 약초를 쫓아 다녔다. 녹음방초 짙어지던 일월의 봄, 들꽃 향내와 미풍이 산객들의 발길을 잡아 두었던 그곳에서 우린 이름 모를 산나물들의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일월산은 천연의 감로수와 무릎을 덮는 부엽토를 자양분으로 키워낸 각양각색의 임산물을 우리들에게 돌려줄 채비를 하고 있다. 약초캐기가 제철을 만난 것이다. 이곳에서는 사철 임산물 수확이 계속되지만 지금이 최고의 적기다.
10월 첫휴일 우리 일행은 30년 경력의 일원산 약초꾼 김성조(64·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씨를 따라 일월산을 올랐다. 동화재 능선을 오르자 상큼한 산내음이 덕지덕지 쌓였던 일상의 권태와 피로를 말끔히 털게 한다.
여느 일월산 산행때와는 달리 사람들과 쉽게 마주친다. 산더덕이며 산주치, 천마 등 약용식물을 얻으로 나온 약초꾼들이다. 허름한 약초 망태기 대신 세련되고 간편해 보이는 배낭을 멘 것이 다를 뿐 기나긴 세월 일월산에 약거리와 먹을거리를 의존해 살았던 민초들의 모습 그대로다.
일원산 가을 산약재중 가장 인기가 있어 많이 채취되는 것은 단연 더덕이다. 양도 많고 약초꾼들이 어렵잖게 짭잘한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 경이면 주변 나무 둥치를 칭칭 감으며 돌아선 줄기 끝에 노랑 좁쌀을 한 움큼 물고 있는 입모양의 자줏빛 꽃망울을 터뜨린다.
동화재 능선을 따라 10분쯤 올랐을까, 한풀 죽은 칡덩굴 위로 더덕줄기가 흐드러져 널렸다. 얼마나 많은지 마치 씨를 뿌려 밭을 일궈논 듯 하다. 한뿌리라도 캘 수 있을까 미심적어 연장이라고는 달랑 나무막대기 하나만 챙겨 나온것이 민망하다. 영락없는 얼치기 약초꾼의 행색. 생전 처음으로 산덕을 캐는 경험에 30분이 훌쩍 지나 버렸다.
두다리를 곧게 뻗친 모습이 흡사 인삼과도 같다. 그 자리에서 흙을 훌훌 털고 껍질을 벗겨 한입 베어 물었다. 제법 알싸한 맛이 온 입안을 맴돈다. 진한 향내가 오랫동안 콧속에 묻어 나온다.
일원산에서 생산되는 산더덕은 연간 4t. 일반 재배 밭더덕에 비해 향이 진하고 육질이 연해 농촌 5일장을 통해 1kg당 3, 4만원에 거래된다. 이마저도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다. 가을철 영양을 찾는 외지인들의 구입 주문이 줄잇기 때문이다.
모조리 캐 담고 싶은 욕심을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하는 김씨를 따라 나섰다. 골골을 거침없이 내딛는 김씨의 걸음이 마치 날다람쥐 같다. 평지를 걸어도 저렇게 재빠를 수 없을 터. 산사람의 이골난 발걸음을 쫓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다.
20분을 지났을까. 참나무와 물푸레나무들이 빼곡한 능선에 이르러 김씨는 곧추선 약초 군락을 손짓으로 가르킨다. "이게 임산부들이 산후조리 때 다려먹는 산주치지, 뿌리는 짙은 자주빛과 검은색이 섞여 있거던, 한사발 달여 먹으면 혈액순환에 그만이제"
바랭이 속에서 호미를 꺼내 조심스레 뿌리를 캐 올린다.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손가락 굵기의 산주치도 일월산의 대표적인 약초란다. 산더덕에 비해 반 금 정도에 팔려 나가지만 부인병을 다스리는 한약재로는 최고로 친다.
영양임업협동조합이 조사한 일월산 자생 임산물(약초) 연간 생산 현황에는 하수오 3.9t, 백출 3.5t, 백지 2.4t, 봉령 12t, 사삼 1.2t, 등이 주류다. 그뿐만 아니라 일엽초와 산작약, 박새, 산뽕, 오갈피, 참죽, 박쥐나무, 다래나무 등 약용 나무와 풀이 50여종 이상이 널려 있다고 김씨가 거든다.
월자봉을 따라 오리골짝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해 또 다른 임산물을 찾기로 했다. 쿵쿵목이를 지나 1km 남짓한 능선에 광할한 소나무 군락지가 눈에 들어온다. 송이 산지다.
자생나무의 천이현상과 우량 소나무의 대폭적인 감소로 일원산 송이 생산량은 근래 10~20년 사이 급격히 감소했다. 10년전만 해도 연간 50t이나 생산되던 것이 최근에는 10여t에 불과하다.
이곳 소나무 밑둥부근에는 송이를 따고 생긴 구멍을 다시 메운 흔적이 즐비했다. 혹시 산주가 두고간 송이가 남아 있을까 한참을 돌아다니며 살폈지만 철이 지난 탓에 웃자라 잎이 손바닥만큼 핀 허드레 송이 2개를 따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우린 이곳에서 말로만 들었던 봉령 하나를 캘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소나무 뿌리에 혹처럼 생겨나 하얀 분가루를 가득담은 봉령, 인공재배가 불가능한 영약이다.
한시간 가량 산을 내려오다 김씨는 오리리 노루모기 뒷산 맞은편 능선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조그만 암자 불향사(佛鄕寺)가 날아갈 듯 앉아있다. 이곳 일대는 산삼 자생군락지로 유명하다. 올해 만도 4명의 심마니들이 20여 뿌리의 산삼을 얻은 곳이다.
20~30년산이 대부분이지만 혹간 70년산 이상 되는 것들이 발견돼 일월산의 외경스러움을 더한다. 이곳 외에도 일월산 곳곳에서 산삼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다만 산신과 교감한다는 심마니에게만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 영물은 아직도 범부의 손길을 거부하는 고고함을 잃지 않고 있다.
일월산속의 장뇌삼밭은 지천에 깔려 무려 3ha에 이른다. 산삼에 비길 바가 못되지만 청정환경에서 생산되는 터라 인삼에 비해 약능이 월등하고 가격도 몇 갑절 높아 일월산 산촌민들의 주요 수입원이다.
이렇듯 일월산은 일제의 침탈 등 숱한 수난의 질곡속에서도 묵묵히 스스로 생채기를 치유해가며 봄날 이름만 들어도 정겨운 개미취, 곰취, 금죽 등 저마다 독특한 맛과 향을 지닌 산채에서부터 만상홍엽지절 값진 약초를 길러내 산촌민들에게 풍성한 먹을거리를 주고 두둑히 쌈지를 채워준다. 이름처럼, 생김새 만큼 풍요하고 베품을 이어가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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