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참을 수 없는 말의 가벼움

입력 2000-10-05 00:00:00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그런데 디지털시대의 가벼움때문인가. 모두들 말이 가벼워져 가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정치인들의 말들이 더욱 가벼워졌다. 천금은 고사하고 백금도 안될 성 싶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은이 되어버린 세상이라 할지라도 역시 말에는 믿음이 제일이라는 뜻에서 여전히 남아일언은 중천금이어야 한다. 그게 그렇지 못하니 세상이 흔들리고 경제가 위기에 빠지는 것 아닌가.

##가벼운 말들

지난해 11월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 경제위기는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선언했다. 거시경제지표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경제현장에서는 '전혀 아니다'는 반응이었다. 특히 지방에서는 '오히려 IMF가 시작된 것 같은데...'하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9개월이 지나자 답이 나왔다. 불행히도 지표경제가 맞추지 못하고 현장감각이 맞춘 것이다. 지난 9월말께 '현재의 경제상황은 97년 IMF때보다도 더 어렵다'는 여당 중진의 고백이나 '우리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대통령의 자인도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다시말해 110조라는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을 틀어넣고도 조금도 개선되지 않은 금융계 현실이 말해주듯 우리의 경제현장에서는 개혁이 별로 진척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공공부문의 개혁부진이 대표적인 것이다. 겉으로는 나아진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골병들어 있었던 것이다. 일시적 회복이었지 완전한 극복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제유가인상 등 외부요인도 크지만 구조조정 미흡 등 내부요인도 컸던 것이다.

최근 홍콩의 어느 금융계 인사는 한국경제의 어려움을 보면서 "97년 IMF위기는 정부의 오만에서, 지금은 정부의 자기도취에서 온 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어느 나라도 금융위기가 지나갔다고 하지 않는데 유독 한국만이 '경제위기는 완전히 극복되었다'고 선언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경제위기극복 선언은 국민을 안심시킨 효과는 있었겠지만 경제를 살리는 데는 실패한 것 아닌가. 국민의 허리띠를 너무 일찍 풀게 했기 때문이다. 말의 가벼움이 몰고 온 횡액이다.

이외도 말의 가벼움은 지속되고 있다. 민주당은 사무부총장과 원내총무가 스스로 부정선거 축소 및 선관위 실사에 개입을 했다고 발언했는 데도 그것은 실언(失言)이라고 발뺌하고 있다. 한빛은행 부정대출과 관련해서는 검찰이 내린 임시결론에 대해서는 검사마저 못 믿겠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한일정상회담 결과 브리핑 내용이 한.일 양국이 서로 다르고 남북장관회담 내용도 다르며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의 미군철수주장 포기도 남북이 서로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남편중인사라고 하는데도 여당은 요직에 영남인사가 더 많다며 한술 더뜨고 있다. 어느 정도의 편중이라면 이해하는 국민이 있는 데도 그렇다. 말을 함부로 하고 있다. 더이상 국민을 속이거나 현혹시키지 말라. 정말 참을 수 없는 말의 가벼움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들의 시국선언

대구.경북지역 변호사 112명과 대구지역 13개 시민단체들이 지난 9월21일 동시에 시국선언을 했다. 현 정국에 대한 우려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집단적으로는 제기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을 받을 만 한 사건이었다. 현 시국을 국정파탄의 위기라고 규정하고 과감한 개혁을 요구했다. 반DJ정서가 강한 지역이라고해도 단체의 성격상 결코 지역감정이 작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춘추전국시대 위문후(魏文侯)는 수렵을 맡아보는 하급관리와의 '말의 약속'을 지키려 비를 맞으며 약속장소인 들판에 나갔다. 왕이 이러니 백성들은 자연 법을 지키게 되고, 또 인재는 사방에서 모여들어 당시 강국이었던 진(秦)나라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자도 제자 자로(子路)와의 대화에서 "명분이 서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군자는 말에 있어 구차스러운 바가 없어야 한다"라고 했다. 개혁을 하려면 물론 개혁 내용이 더 중요하겠지만 그래도 말에 신뢰가 없다면 개혁을 할 수 없다. 말부터 개혁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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