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이하기만한 듯한 세상, 그러나 때때로 곳에 따라 별천지가 숨어 있어 단조로움을 깨친다. 대구 종로2가의 미도 다방, 그곳은 하루 1천명 이상의 할아버지들이 '내집'으로 누리는 독립 공간이다.
미도에선 60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는 그저 막내 축에 들 뿐이다. 날이 밝으면 먼저 70대 후반 할아버지들이 찾아들어 오전시간 미도의 주인이 된다. 낮 시간의 터줏대감님들은 80대 할아버지. 60대 후반의 할아버지들에겐 오후가 돼야 차례가 돌아온다.
그러나 할아버지들에게 미도는 그저 차나 한잔하는 다방만은 아니다. 집이나 별 차 없는 일상의 생활 공간. 한 할아버지는 말했다. "하루쯤 안 들어가도 상관 없으면서도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하는 내 집과 같다"고. 시내 중심 자리이지만 한잔에 1천500원밖에 안하는 따뜻한 차가 있어 좋고, 친구가 있어 더 그립다. 외톨이도 미도에서는 금세 친구를 사귄다.
하지만 할아버지들을 정작 푸근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두 손을 꼭 잡아주는 누이 같은 마담이다. 다방 안을 빼곡이 메운 할아버지들 사이, 한복 곱게 입고 꽃길 걷듯 사뿐사뿐 그림자 같은 중년 여인. 걸음 뗄 때 마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하얀 버선이 맵시를 더한다.
주인 정인숙(49)씨. 차라리 할아버지들의 오래된 연인이다. 어쩌면 해결사라 해야 옳을지도 모를 사람. 할아버지들은 뭐든지 다 해달라고 정씨에게 보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차비가 없으면 차비를 달라하고, 땀이 나면 손수건을 내놓으라 한다. 마치 맡겨 두기라도 한 것처럼.
돈 6만원과 비아그라 광고지를 슬며시 내미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차마 몸소 사 볼 용기는 없고 다른 이에게 부탁하기도 쉽지 않더란 얘기. 버스에서 오줌을 지려버린 할아버지도 찾아든다. 가족이야 있지만 하루종일 입방아 찧을 할머니보다는 정씨가 편안하기 때문.
정씨가 할아버지 찻집을 연 것은 19년 전이다. 대학생들이 주로 찾던 다방을 인수한 후 학생들을 쫓아버렸다. 거창한 뮤직박스도 미련 없이 뜯어냈다. 할아버지들에게는 조용하고 커다란 어항이 더 어울리기 때문. 단골이었던 학생들의 저항은 시끄러운 음악의 추방으로 쓸모 없어진 유성기판을 나눠주며 달랬다.
정씨는 그제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아침 8시30분만 되면 다방으로 출근한다. 맨먼저 하는 일은 들깨죽을 듬뿍 준비하는 일. 아침 일찍 찾는 할아버지들의 건강식이다. 늦게 오는 할아버지들이 삐칠라, 오후에는 과자와 과일을 내놓는다.
대가족의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정씨에겐 노인들 모시기가 무척 즐겁다고 했다. 멀고 험한 길을 걸어 온 어른들의 말씀에서 삶의 지혜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손님 중에는 친아버지의 벗도 있다. 어린 정씨를 귀여워해 주던 장년이 이제는 정씨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다감도 병인가, 터무니 없는 오해도 겪었다. 정씨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했고, 결국 미소 띠고 돌아가긴 했지만 들이 닥칠 때의 노기가 푸르락누르락 하던 할머니도 있었다. 주변 다방의 곱지 않은 시선 역시 감당해야 했던 무거움. 하지만 모두 지난 일이 됐다.
주인을 닮았는지, 이곳에서 일하는 일곱 명의 남녀 종업원들도 한번 발붙이면 모두가 긴 식구가 된다. 가장 신참의 경력이 무려 8년. 이양은 15년을 넘게 주인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 할아버지들 역시 한번 이 곳을 찾기 시작하면 더 이상 몸을 움직이기 힘들 때까지 변함없이 발길을 계속한다.
그런 저런 편안함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더니, 어느듯 미도는 풍경까지도 달라졌다. 벽에 붓글씨나 묵화 액자 족자가 가득한 것도 그 중 하나. 할아버지들이 세월을 묵혀 뿜어내 놓은 고치들이라 했다. '정인숙'으로 시작하는 한시, '미도'로 시작하는 한시… 주제도 다양했다. 아마추어 작품이라지만, 솜씨는 거개가 수준급. 생활 공간으로서의 의미조차 훌쩍 넘어서서, 미도가 할아버지들의 문화공간으로 침윤됐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주인 정씨에게는 더 넓다란 소망이 있다고 했다. 3층짜리 건물 하나 지어, 가요방·식당·휴게실을 모두 갖춘 노인 종합 시설을 만드는 일.
그랬다. 취재기자에게도 미도는 즐거워 보였다. 눈이 알아채는 그것이 아니라, 살갗이 먼저 감지하는 기꺼움. 거기엔 먼 길을 걸어온 할아버지들과 색 바래지 않는 아름다운 한 중년 여인이 있었다.
曺斗鎭 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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