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데스크-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입력 2000-09-13 14:51:00

나흘에 걸친 추석 연휴도 어느새 끝나간다. 우리네의 유난스런 귀소본능은 올 추석에도 어김없이 민족의 대이동으로 나타났다. 성질 급하기로 국제사회에서도 소문난 우리가 허파가 수십 번은 터질 만한 굼벵이 귀향.귀성길을 이때만큼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잘 견뎌낸다. 부모.형제.고향을 향한 그 두텁고 끈끈한 정은 못말릴 정도이다. 1년 중 가장 풍성하고 아름다운 계절 가을에 민족의 마음을 하나로 잇는 전통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 심신이 괴로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름 아닌 '며느리'라는 이름의 여성들. 올 추석에도 며늘네들은 며칠전부터 까다로운 차례상 장보기에 지치고, 추석 전날부터는 음식장만으로 발이 통통 붓고, 당일엔 종일 일가친지들 상차리느라 허리가 뻐근했을 게다. 그래서 명절 쇠고나면 며느리들은 몸살을 앓는다.

◈명절이 고통스런 여성들

최근 충북여성민우회가 청주지역 남녀 3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명절체험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여성들의 솔직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조사대상 여성중 34.2%는 "명절은 고통스러운 것"이라 답했고, 17.1%는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답해 절반이 넘는 51%가 명절을 괴로운 날로 여기고 있다. 반면 남성들은 "바쁘지만 기쁘다" "매우 기다려진다"가 64%로 였다. 모르긴해도 이 조사를 대구.경북지역에서 했더라면 여성들의 불만지수는 훨씬 더 높게 나타났을 것 같다.

또 명절에 아내들의 끓는 속을 수시로 건드리는 것은 남편들. 아내들이 고양이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바삐 일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온갖 잔심부름 시켜가며 술마시고 화투치며 남자의 특권을 한껏 즐기는 모습에 솔직히 배알(?)이 틀린다고 한다. 평소 집안일을 가끔씩 도와주던 자상한 남자들도 이날만큼은 냉정하다. "사내가 무슨 부엌출입이냐"는 어른들의 핀잔이 듣기 싫어서이다.

◈불만지수 갈수록 높아져

이때문에 이 땅의 많은 며느리들에게 명절은 즐거운 날이라기보다는 '고통절' '일뜸질하는 날'이 되고 만다. 신경이 예민한 이들은 명절이 다가오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명절증후군에 시달리기도 한다. 자아가 강한 신세대 며느리은 "왜 여자들만 명절에 뼈빠지게 일해야 하느냐?"며 애꿎은 남편을 닥달하기도 한다.

이웃나라 중국에선 부부간 가사분담이 매우 자연스럽다. 부엌일은 물론 아이양육, 청소, 빨래 등 가사 전반에 걸쳐 서로 의논하며 집안일을 꾸려간다. 반면 우리네는 가사부담이란 짐을 아내의 연약한 어깨에만 몽땅 올려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중국남성들 중엔 "한국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란 농담도 나온다.

◈무조건적 희생 강요해선 안된다

금세기를 '여성의 시대' 라고들 한다. 여성인권의 사각지대, 검은 차도르의 땅 아랍세계에서도 여성을 채운 족쇄가 하나 둘 풀려지고 있다. 가장 완고한 나라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올해 유엔이 주도해 만든 '모든 형태의 여성차별 철폐조약(CEDAW)'에 가입, 앞으로 여성의 고용과 결혼생활에 대한 법률전반을 개정할 자세이다. 여성 운전을 금지했던 아랍에미리트와 사우디가 여성택시운전을 허용했고, 이집트는 오는 11월의 국회의원선거에 사상 처음으로 여성후보를 내보낼 것을 밝혔다. 세계적 통신사인 AP통신은 지난 2월1일부터 남녀차별철폐의 상징적 선언으로 "'미스'나 '미세스'는 물론 여성의 통칭으로 쓰이던 '미즈'조차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시대는 눈이 팽글거리는 21세기인데 우리는 아직도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이라는 전래의 사고에 묶여있는 것 같다. 남녀불평등이 전제된 가정내 부부 역할도 이젠 재고돼야 하지 않을까.

'결혼은 선택, 직장은 필수'라는 말이 나올 만큼 요즘 여성들은 자기 일, 자기의 세계를 중시한다. 전통시대의 여성들처럼 무조건적인 희생을 원치 않는다. 거대한 지구촌도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지혜와 능력이 뒷받침돼야만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다. 명절엔 아내와 누이, 며느리의 고달픔을 한 번쯤 생각해보자. 그리고 도울 방법도. 추석때 온 삭신이 아프다는 주변의 많은 여성들을 보며 생각해본 소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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