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을 털어내는 태풍이 일월산 자락을 휘감고 지나간다. 일월산 골짝중 가장 골이 깊고 넓은 일월면 오리동. 골짝 초입에서 비포장 길로 30여분 거리의 심곡(深谷) '노루모기'에는 강풍과 장대비에 이내 쓰러질 듯 허름한 산막 한채가 힘겹게 서있다.
산막을 둘러싸고 있는 고추밭도 장대비에 아우성을 친다.
이 일대는 일제가 극성하던 시기,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구세군 교도들의 민족학교와 분영이 있었던 곳. 일제하의 민족혼을 다잡은 구세군 성지였다.
허물어져 가는 산막은 다름 아닌 한국 구세군사를 새롭게 쓴 김해득(金海得·1918~1980) 14대 한국사령관이 태어난 생가다.
흙벽 일자(一字)형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좁은 간살의 방 두 개는 용도나 행색으로 보아 막다른 생을 살던 여느 초라한 화전민가나 다름없지만, 김사령관의 생가로 또 다른 항일민족정신이 태동한 모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냥 지나쳐 보이지만은 않는다.
1908년 10월 1일. 영국인의 허기두사관과 가족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낮선 땅 한국에 발을 디뎠다.
한말 국운이 사그라들던 시점에서 구세군은 가난 구제와 자선, 사회사업 등 선교활동을 본격화하고 속속 등장한 한국인 사관들이 주축이 돼 민족정신을 지탱하는 종교단체로 자리잡게 된다.
일제 조선총독부 강압이 극에 달하던 1925년경 일월산 노루모기 골짝에는 구세군 영양분영이 설립된다. 배경은 미리 설립된 영덕분영을 중심으로 영양지역으로의 세확장을 추진하면서 구세군 사관학교 정규과목으로 다루던 지맥과 수맥을 이용, 일월산 일대를 살핀 결과 오리골 노루모기가 가장 좋은 명당으로 판단됐던 때문이라 한다.
또 한편으로 오리골짝은 일월면 소재지와 30여리가 넘는 거리에 위치해 있고, 상대적으로 골이 깊어 일본인들의 감시가 소홀해 신앙활동과 교육활동에 자유로웠다는 지리적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양군 일월면 오리동 529의2번지 168㎡의 분영터. 해방직후인 1946년경까지 20여년간 분영과 학교가 운영됐다.
노루모기 골짝에서 태어난 손창대(동국대교수·한국화엄학회 회장)박사는 "1925년경부터 구세군 분영의 간이학교에서 조선어와 한글을 익혔다"고 밝힌다.
이 학교는 당시 1~4학년 과정의 비인가 간이학교로 운영되면서 '조선어독본'을 이용한 우리말과 우리글, 우리역사 가르치기로 아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게 하는데 교육중심을 뒀다는 것.
50여평 크기의 목조건물 2동으로 만들어진 분영과 학교. 이 곳과 700여m 떨어진 운동장.
교실과 학교 마당에는 수십 여명의 아이들이 2명의 한국인 구세군 교사들과 함께'가갸거겨…'를 외우는 소리가 이어졌고, 그 청음(淸音)은 산울림이 되어 일월산 자락에 잔잔하게 채워져 갔다.
안타깝게 지난해 태풍으로 학교 목조건물이 허물어지면서 흔적을 상실한채 고추밭으로 변해있다. 아이들이 뛰어 놀던 운동장은 논으로 변해 벼들이 누렇게 영글고 있다.
이곳 주변에는 지금도 건물축대였던 석축과 건물 잔재물로 보이는 쇠붙이와 연장들이 땅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학교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만은 아니다. 유별나게 우리 일행의 눈길을 사로잡은 무궁화. 학교·분영 터였던 고추밭을 둘러싸고 국화(國花)인 무궁화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다. 당시 민족혼을 일깨우려 했던 구세군 교사들의 정신을 보여주는 듯 하다.
김기일(61·일월면 오리)씨는 "어릴 적에 마을 형들이 학교에 다닌 것을 기억한다"면서 "해방 이후 운영이 중단될 때까지 20여년간 이 학교를 거쳐간 학생들만도 수백 여명에 달했고 일월산 오리골 출신의 김해득 사령관도 그 중 한사람 이었다"고 회고한다.
김해득 사령관은 1918년 분영옆 산막에서 태어나 이곳 구세군학교를 다니며 민족정신과 구세군 교리에 영향을 받게 된다.
김 사령관의 셋째아들 김진규(54·경기도 안산시)씨는 "아버님은 이 학교를 통해 조선어를 깨우치고 초급학교를 영양에서 나왔고, 이후 안동시 법상동 큰댁으로 유학해 1938년 20세의 나이로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 본격 사관으로 활동하셨다"고 한다.
덩굴과 잡초무덤에 반쯤 묻혀있는 생가는 수십년 풍상에도 불구하고 흙벽 그대로 남아있다. 생가 맞은편으로 깊게 난 골짝의 서기(瑞氣)가 집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 것이라고 한다.
손창대박사는 "이 집은 일월산 골짝이 산그림자에 어두워질 오후녘에도 맞은편에서 쏟아지는 서편 햇빛이 들어 언제나 해가 비추는 명당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일제의 폭압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노루모기 구세군 분영과 학교. 한국인 교사들. 이 곳에서 민족정신을 배운 김해득 사령관.
이들 모두는 갈수록 심했던 일제의 탄압과 신사참배 강요로 이어지는 총독부의 종교탄압 등의 수난에 민족교육이라는 정신으로 저항했으리라.
60여년이 흘러 최근 들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이곳 민족교육장에 대한 성지추진과 생가 복원화가 조심스레 싹트고 있다.
구세군 대한분영과 영양군을 비롯 김사령관의 후손들은 지난해 가을 이곳을 답사해 성지화와 관련 기념사업을 추진키로 뜻을 모으고 빠른 시일내 실행에 옮긴다는 방침을 세웠다.
나라 잃은 산촌민들의 희망 없는 삶에 한 줄기 빛으로 다가왔던 구세군 분영과 민족학교. 지금도 이 곳 오리골 산촌민들의 가슴과 뇌리에는 그들의 '자유존중과 평등사상'이 끈끈하게 남아있다.
---김해득 14대 사령관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시기 일월산 골짜기 영양군 일월면 오리리 속칭 '노루모기'에서 태어나 1970년대 한국 구세군사의 전환점을 마련한 김해득(金海得·1918∼1980) 14대 구세군 한국사령관.
김 사령관은 일제의 감시가 소홀했던 오리골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산외(山外)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상과 민족정신을 가질 수 있는 성장기를 지냈다. 특히 자식 교육에 남달랐던 부모들은 김 사령관이 일찍이 민족정신과 봉사에 전념할 수 있는 성장 환경을 만들어 준다.
지금도 이 골짝 주민들 사이에는 부모들이 김 사령관을 재울때나 달랠때에 불러 주었던 흥얼거림을 기억하고 있다.
"장관이 될까 도장관이 될까 우리 해득이 잘도잔다 나라동량 민족동량 우리 해득이 장관될까"
부모들의 염원 때문이었을까. 김해득 사령관은 한국 구세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김 사령관은 자신과 절친했던 손형택 등 친구들과 함께 1925년경 설립된 구세군 영양분영 민족학교에 입학, 우리말과 글을 비롯해 구세군 교리를 익히게 된다.
이후 일월초등학교에 편입, 졸업하고 안동시 법상동의 큰댁으로 출향하면서 본격 구세군교회에 입문, 사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는 1938년 20세 나이에 구세군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금불랑(지금의 북한 통천 부근으로 알려짐)영문에 첫 발령받아 선교사업을 벌였다.
1974년 구세군 출신으로는 최초로 KNCC(한국기독교협의회)회장과 기독교 방송국 이사로 선출돼 한국 기독교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김해득 사령관은 이듬해인 1975년 서기장관으로 임명되고 1977년10월7일 제14대 한국사령관으로 취임, 왕성한 구령사업(救靈事業)과 사회·교육사업에 전념하다 198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45년여를 구세군에 몸 담았다.
김 사령관은 중앙신학대학을 비롯해 고려대 경영대학원, 연세대 교육대학원, 구세군만국 사관대학(영국 런던소재)을 졸업하는 등 일생을 배움에 전념했다.
또 구세군 청년부와 자산부·전장부 서기관을 거쳐 한국사령관으로 취임, 재임 기간동안 한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을 추진하고 개척운동과 자급화운동을 본격화했다.
이 운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군국성장전략연구회에 의해 만들어진 2000년까지의 성장목표에 따라 연구와 개척수련회, 성장 세미나 등 군우확보와 사역자 수급을 비롯 선교회관 건립 등 한국 구세군 발전에 큰 획을 그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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