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길을 달려 산 속 사찰에 다다르면 나타나는 오래 된 불상과 이끼 낀 돌탑. 언뜻 겉보기에 비슷비슷하지만 사찰 건물과 불상, 탑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사찰과 탑의 건축 양식, 불상의 얼굴 모습에는 나라를 구하거나 미륵을 기다리는 그 시대 왕가와 민중들의 염원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한 물 간 것으로 치부되는 정물화도 마찬가지. 세밀한 묘사와 조형을 표현하거나 습작 과정의 장르로까지 여겨지기도 하는 정물화에는 보기보다 만만찮은 의미와 철학이 숨어있다. 특히 황금시대를 구가한 17세기 네델란드의 정물화는 치밀한 기교, 뛰어난 상징성, 때때로 엽기적 표현까지 동원, 숨막히는 충격을 안겨주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최정은 지음, 한길아트 펴냄,380쪽,2만2천원)은 바로크 시대에 왜 네델란드에서 정물화가 발전하고 다양한 상징과 표현으로 사랑받게 되었는지를 다룬 책이다. 정물화의 발전과 쇠퇴의 파노라마는 네델란드 황금시대의 성쇠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그 시대의 사회, 종교적 삶, 세속적 욕망과 풍속, 장미빛과 암흑으로 교차되는 인생관을 훑어내리고 있다.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네델란드는 대외무역의 성과로 번영의 길을 걷게 되고 화가들은 정물화를 통해 이를 표현하게 된다. 중세가 끝나고 근세로 접어들면서 성서속의 심오함을 주로 표현해오던 화가들은 이전의 화풍만으로 근세의 다양해진 삶을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도 정물화는 종교화에 비해 하찮은 장르로 취급받았었다.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사계절'은 정물화의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평가받은 계기가 된 작품이다. 왕과 왕자의 초상을 온갖 과일로 장식하면서 계절의 변화를 인간사의 성쇠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어 등장한 다른 정물화 또한 물.불.대지.공기 등 사원소와 촉각.미각 등 오감각, 완성을 의미하는 12 등 숫자를 나타내는 사물들을 도입, 풍성한 상징의 상찬을 제공했다.
꽃과 과일 그림도 상징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벌레먹은 과일은 죽음과 부패를 의미하며 장미는 사랑을 나타냈다. 30년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나자 등장한 해골은 인생의 덧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됐다. 청어와 소시지, 조개와 굴 등 음식들은 부유하거나 청빈한 삶, 육체적 욕망과 타락 등을 표현했다. 이렇게 발전한 정물화는 집 한채 값을 넘는 고가로 거래되는가 하면 복잡한 상징과 갈래갈래 뻗은 표현들은 그림을 해석하는 도상학(圖象學)이라는 학문까지 생겨나게 만들었다.
金知奭기자 jise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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