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대해 눈감은 자들은 미래도 볼 수 없다" 2차대전 전범 국가인 서독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지난 85년 종전 50주년을 맞아 의회에서 한 연설이다. 그와 달리 같은 전범국인 일본은 "지나간 과거사를 덮어버리자"고 한국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런 일본 태도에 맞서 최근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본과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이 어떤 결과를 몰고 올 것인지, 또 민간차원의 소송사태가 한-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제적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다. ◇일본 상대 소송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크게 2가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불임금 반환 및 피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과 일본이 피폭자원호법의 적용대상에서 외국 거주자를 제외한 것이 잘못이라며 취소를 청구하는 것이 주된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강제징용 및 정신대 피해자들이 피해를 구제받을 길이 사실상 없었다. 일본 정부가 지난 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책임 문제가 해결됐다고 주장하고 법원도 이같은 인식 속에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었기 때문. 지난달 강제징용 피해자 이종숙(68)씨 등 3명이 후지코시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본 최고재판소가 해결금 1억원을 지급토록 했지만 이는 사죄 언급도 없고 판결이 아닌 화해에 불과했다. 결정적 여건 조성은 미국에서 이뤄졌다. 지난해 캘리포니아주가 강제징용 등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나치와 그 동맹국을 상대로 2010년까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민사소송법을 개정한 것. 이어 지난 6월에는 뉴욕주에서도 법안을 개정했고 다른 주로도 법안 개정이 확산될 전망이다.
유대인대학살의 희생자 및 그 가족들이 개정 법안에 따라 독일과 스위스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이미 승소했다. 이에 고무된 재미교포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캘리포니아주 법정, 연방정부 법정에 미쓰이, 미쯔비시, 신일본철강 등 일본의 현지 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둔 상태.
또 미국의 대형 로펌들은 독일과 스위스를 상대로 한 승소결과를 토대로 한국의 정신대 피해자들도 승소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원고를 모아 이달중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잇따른 한국인의 소송 제기가 일본 기업의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자 주미 일본대사는 최근 "우리도 할 말이 있다"며 법을 개정한 미국에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원폭피해국이라 강조하는 일본인 만큼 미국을 상대로 피폭피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미국 상대 소송
지난 45년 8월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3일뒤 나가사키(長崎)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때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가 있던 한국인 피폭자는 히로시마 5만여명, 나가사키 2만여명 등 7만여명으로 총 피폭자의 30% 이상. 이중 4만5천명이 사망하고 2만5천여명이 귀국했으나 현재 1만3천여명(합천 4천명, 대구.경북 1천500명)이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대구의 법무법인 삼일(변호사 최봉태)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한국피폭2세회 등 피폭자들과 논의, '승전 국가라도 잘못된 전쟁수단(원자폭탄)을 사용했다면 책임을 져야한다'고 보고 워싱턴 등지 법원에 피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안을 강구 중 이다. 일본 피폭자의 경우 전범국인 만큼 소송 당사자가 되기 미약하나 한국 피폭자들은 소송을 제기, 피해를 구제받는 것은 물론 핵확산방지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판단인 것. 미연방법은 그러나 '전시중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규정, 미국 법원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최봉태 변호사는 "승소를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며 "필요하다면 29개 핵피해국과 반전-반핵단체와도 연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그러나 어설픈 소송은 일본의 전후청산 문제를 왜곡시키고 전쟁책임을 희석시킬 우려가 있다"며 "1년 정도 준비해 여건을 성숙시킨 다음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전후 청산
독일은 전후 청산에 대해 적극적이다. 지금까지 930억마르크(49조원)를 나치 피해국에 지불했고 앞으로도 유태인 등 피해자에게 305억마르크(16조원)를 지불할 예정이다. 빌리 브란트 수상은 바르샤바의 전 겟토(유대인 거주 지역)에서 무릎을 꿇고 역사적 범죄에 대해 사죄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와 전혀 다르다. 지난 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일본은 한국에 3억달러를 무상 제공하고, 차관 2억달러를 제공, 1억달러 민간 신용제공으로 하는 것으로 일체의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일본이 서둘러 한국민에 대한 피해 배상을 하지 않으면 차후에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미국 국제인권소위원회, ILO전문가위원회는 물론 미국무성도 지난 2월 인권보고서를 통해 일본에 국가보상을 권고하고 있다. 인터넷도 무시 못할 존재. NGO의 인터넷 사이트인 휴먼라이트워치(www.hrw.org)와 인터넷워크(www.state.gov)는 미국무성의 보고서의 전문을 전재하고 위안부 문제 등에 변화가 없는 일본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조만간 단행될 예정인 북일수교도 일본엔 큰 부담이다. 일본의 아킬레스건인 강력한 전쟁 피해보상 및 배상 상대가 하나더 생기는 셈이기 때문. 법무법인 삼일은 북한이 일본과 수교 협상시 유리한 위치에 서도록 일제시대 때 군표.예금증서 등 장롱속 유가증권을 모아 북한에 보내는 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유가증권 기증운동은 남북 통일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일방적 피해자만은 아니다. 월남전 참전이 그것.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민간인 학살 등 전후 청산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베트남의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 우리 정부와 기업의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崔在王기자 jw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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