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2일 오전 10시 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을 거쳐 북측 지역으로 넘어갔다.
북송 비전향 장기수들은 이에 앞서 이날 오전 8시 7분께 대형버스 3대와 구급차2대에 분승, 숙소인 서울 종로구 평창동 북악파크텔을 떠나 9시 40분께 판문점 남측지역 '자유의 집'에 도착했다.
이들은 당초 오전 9시 20분께 판문점에 도착할 계획이었으나 전몰군경유가족회측의 피켓 시위로 20여분 정도 도착이 늦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다과를 들며 잠시 휴식을 취한 장기수는 10시 5분께부터 강동근씨를 시작으로북측 지역으로 차례로 송환됐다.
특히 조창손씨는 고열로 인해 며칠 전부터 국립의료원에 입원하고 있다가 이날링거를 꽂고 휠체어에 탄 채 환자복 차림으로 북측 지역에 들어섰다.
이날 송환된 홍문거씨는 "남행을 희망하는 사람이 남측 지역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북측에 올라가면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송환을 적극 건의할 것"이라고밝히기도 했다.
노모를 남측에 남긴채 송환된 신인영씨는 "북측에 가면 초청장과 신변안전보장각서를 어머님께 보내 초청할 계획"이라며 "감옥에 있을 때나 나와 있을 때 도와준남녘 동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고 말했다.
약 15분간 진행된 장기수 63명의 인도인수 절차를 마친 판문점 연락관들은 '비전향 장기수 인도인수 확인서'를 교환하고 송환절차를 마쳤다.
한편 북측은 5백여명의 환영객이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 모여 이들의 송환을맞이했다.
#비전향 장기수 북송 이모저모
2일 오전 비전향 장기수 63명에 대한 환영행사 준비는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을 마주보고 있는 판문각이 아닌, 이 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통일각에서 주로 이뤄져북측이 남측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나름로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러나 판문각에서는 북한 적십자회 요원과 의료진, 장기수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기 위한 화동(花童) 등 50여명이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통과해 나오는 장기수들을 일일이 박수로 맞아들였다.
장기수들의 인계 통로인 중감위 회의실에는 건강 체크를 위해 북적 의료진 2명이 따로 나와 있었으나 대부분 기록만으로 대체, 통과시켰다.
장기수들은 이날 오전 10시 5분께 강동근씨부터 중감위 회의실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다소 흥분된 상태이거나 감회어린 표정으로 보였으며 남측연락관들에게 간간이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했다.
43년 10개월 수감으로 세계 최장기수 기록을 가진 김선명씨가 중감위 북쪽 출구를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북측 관계자는 김씨를 와락 껴앉고 감격적인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빨치산 출신의 김국홍(인서)씨는 휠체어에 의지한채 중감위 회의실을 통과, 북측 출구쪽에 다다르자 눈물을 터트렸다.
#장기수의 귀거래사
노동당 대남담당 김중린 비서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리 씨 조에게 주어진임무는 지하당 사업과 '대동복귀자' 1명을 확보하라는 것. 지하당사업은 노동자 중에 사람을 선정하여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포섭하여 그를 기점으로 '사업'을확대하라는 것이었다.
"김중린 선생을 과장이 모시고 나왔는데 두 차례나 우리 조가 올린 '임무 계획안'에 미비점을 지적하며 세 번째 올리고 나서야 승인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는 과장의 보증으로 70년 2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임무가 부여된 뒤 모 처에서 4개월간의 집중 훈련에 들어갔다. 임무 수행 대상지는 경북 대구 신천동. 신천동은 그 때 당시만해도 방직공장이 많았는데 공장에 들어가 지하당 사업을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김중린 비서의 최종 결정으로 70년 6월 4일 평양을 떠나 5일 원산에서 상륙연습을 한 차례 갖고 6일 새벽 '공작선'에 올랐다.
리 씨 등은 나흘만인 10일 경북 월성군 봉길리 태종암에 상륙, 경주석굴암을 거쳐 대구까지 왔으나 하숙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신분이 발각돼 23일 체포됐다. 평양을 떠난 지 19일만이었다.
그는 북쪽에 형님 외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남쪽을 떠나 북으로 가는이유에 대해 "남쪽보다 북쪽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우를 받은 곳도 북이었고 북쪽에 가서야 인생의진로와 할 일을 알게 됐으며 자진해 나선 '통일사업' 동료에 대한 '동지애'를 버릴수 없다는 것.
또 형님이 북쪽에 살고 있고 김일성 주석이 평범한 농민의 집인 형님 댁을 직접찾아준 사실도 결코 잊지 못할 일이었다고 말한다.
이 모든 일들은 그가 북쪽을 택하게 만든 이유도 되면서 30년간의 혹독한 감옥살이와 끔찍한 '전향공작'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됐다.
그가 가장 가슴아파 하는 것은 자신으로 인해 남쪽에 살고 있던 누님과 그 가족들이 모진 고초를 겪은 것이다.조카 중 하나가 육사에 가려 했는데 신원조회에 걸려포기한 사실도 출소 후에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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