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엔 나도 갈수 있을까"
○…"다음번엔 나도 고향땅을 밟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북에서 돌아오면 고향소식이라도 좀 들었으면…"
15일 오전 워커힐 호텔을 찾은 이금례(75)할머니는 이산가족들을 태우고 떠나는 버스들을 보며 부러움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향이 황해도 연백인 자신 대신 북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먼발치서나마 배웅도 할 겸 동향 사람들을 만나 고향소식이라도 부탁하고자 아침일찍 일어나 같은 실향민인 동네 할머니 2명과 광화문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것.
이 할머니는 6.25가 터지던 해 가을 부모님, 4남매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길에 오르면서 북에 남긴 언니 금봉(84)씨와 복삼(63)씨 등 여동생 2명과는 영영 소식이 끊겼다.
남과 북을 잇던 뱃길이 끊기면서 '조금 있다 데리러 가겠다'는 말은 영영 지킬수 없는 약속이 돼버린 것.
"다음에는 나도 꼭 갈수 있을까"라는 말만 여러번 되풀이하던 이 할머니는 마침내 눈시울이 흠뻑 젖은 채 버스가 떠난 뒤에도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생애에서 가장 긴 하룻밤
○…"내 생애에서 오늘밤이 가장 지루한 밤이 될거야"
"내일 정말 만날 수 있을까…"
"금쪽같은 내 아들, 살아있어줘 고맙다"
50년만에 남으로 내려오는 북쪽 가족들과의 상봉을 위해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 투숙한 남쪽 가족 500여명은 14일밤 '상봉의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못한 채 호텔 로비 등으로 나와 북녘 부모.형제 이야기로 하얗게 밤을 새웠다.
둘째 형님 서기석(67)씨를 만나는 대석(53.충남 공주시)씨는 "일찍 아버님을 보내시고 강인하게 살아온 어머니(91)께서 아들의 생존소식에 너무 기뻐 몸을 벌벌 떠시던 것을 생각하면 오늘밤은 어머님 생애에 가장 긴 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생 양원열(70)씨를 만나는 진일(83)씨도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보통 밤 9~10시께면 잠자리에 드는데 쉽게 잠이 올지 모르겠다"면서 "내 몸이 이렇게 불편한데 동생 만나는 일이 아니었다면 나왔겠느냐"고 반문했다.
혈육 그리는 절절함에 숙연
○…올림픽파크텔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북녘 땅의 혈육을 만나기 위해 119구급대와 휠체어 등에 실려오는 등 혈육을 그리는 절절함으로 내내 숙연한 분위기였다.
작은 아들 이종필(70)씨를 만나러 충남 아산군 탕정면에서 올라온 조원호(100) 할머니는 이날 오전 10시30분께 출발, 119구급차를 타고 오후 1시40분께 도착해 휠체어로 객실로 옮겨졌다.
3시간 가량 상경하느라 기력이 쇠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 조 할머니는 "왜 이리 태극기가 많이 걸렸어"라며 아들이 온다는 것을 잠시 잊어버려 주위의 눈시울을 적셨다.
막내딸 종혜(56)씨는 "어머님께서 고령에다 치매로 기억이 오락가락하시는데 내일 오빠를 알아보실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평양음대 무용과 교수도 성장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딸의 혼수를 장만해주고싶어요"
8.15 이산가족 서울방문단에 포함된 평양음악대학교 무용과 교수인 딸 김옥배(68.여)씨를 내일이면 만날 수 있다는 설렘에 홍길순(88.서울 마포구 서교동) 여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를 길 없어했다.
당시 창덕고녀(여고) 1학년이던 옥배씨가 "무용학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지 어언 50여년.
홍 여사는 30년전에 사망신고를 한 김씨가 반세기가 훌쩍 지난 뒤 '인민보건체조 창안자' '북한 예술계 여성박사 제1호'라는 칭호를 달고 나타나 마냥 대견스럽기만 하다.
50년전 헤어진 딸과의 만남을 앞둔 홍 여사는 미수(米壽)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딸의 뒤늦은 '혼수'마련에 피곤함마저 잊었다.
홍 여사는 30년간 자신이 껴온 백금 다이아반지, 손목시계, 옷가지 등 각종 '패물'을 청실, 홍실 삼아 손수 붉은색, 푸른색 등의 다채로운 창호지로 정성껏 포장해 선물꾸러미를 만들었다.
40대 중년여성 금일봉 전해
○…50년 만에 상봉하는 아내를 위해 취로사업에 나가 모은 돈으로 손목시계를 구입했던 이몽섭(74.경기도 안산시)씨에게 중년 여성이 아내와 두 자녀 등 가족 선물구입비로 금일봉을 건네 눈길을 끌었다.
14일 오후 5시15분께 쉐라톤 워커힐 호텔 컨벤션 센터 지하 1층 이산가족 방북단 교육장인 썬플라워룸 앞 로비에서 휴식시간을 맞은 이씨에게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돈이 담긴 흰봉투를 건넸다.
신원을 밝히기를 꺼린 이 여성은 "언론 보도를 통해 형편이 어려워 50년 만에만나는 가족들 선물도 제대로 구입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왔다"면서 "할아버지가 북한에서 돌아온 뒤에도 주기적으로 찾아가서 보살펴 드리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사라졌다.
이어 워커힐 호텔직원들도 이호텔 한종무(57)사장 명의로 준비한 스웨터, 운동복, 화장품 세트, 양말, 세면도구, 라이터 등이 담긴 선물 꾸러미 2개를 이씨에게 전달했다.
방북단에 쥐어준 애끓는 편지
"강산이 다섯번 변하도록 너희들의 소식조차 모르고 한많은 세월을 보냈구나. 아버님, 어머님 생각만 해도 뼈를 깎는 아픈 마음,불효자식 몸 둘 바를 모르겠구나.
이산가족 상봉단에 끼지 못한 한 실향민이 방북단에 포함된 동향친구를 통해 6.25 당시 고향에 두고온 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이산의 한을 달래고 있다.가슴아픈 사연의 주인공은 경기 개풍군 봉동면 지금리 남촌동 전추동네가 고향인 김정일(70)씨.
남쪽에서 봉동면장을 맡고 있기도 한 김씨는 막내 동생 상훈식(56)씨를 만나러가는 상환식(74)씨에게 남쪽 가족들과 찍은 가족사진과 편지를 맡겼다.
고향이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로 남북이 다시 잇기로 한 경의선 전추다리 바로 앞동네인 김씨.
김씨는 편지 겉봉에 '남촌동 전추동네에 사시던 누구 한 분이라도 아시는 분이 계시면 꼭 좀 전하여 주십시오'라고 적어 동생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애끓는 심정을 토로했다.
생사만이라도 알아와 달라
"북에 가거든 내 가족도 찾아주오"
50년만에 감격스런 가족 상봉을 위해 15일 북녘땅을 밟게 될 남측 이산가족들에게 "생사만이라도 알아봐달라"는 이산가족들의 부탁이 쇄도하고 있다.
지난 8일 살아있다던 노모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혼절했던 장이윤(72.부산 진구)씨는 며칠전 동네친구 김기려(74)씨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평북 용천군 양광면 이럭동 이록골이 내 고향이야. 아버님 함자는 김자, 택자, 선자, 처는 최실단, 큰형은 이려, 셋째형은 신려, 동생은 학려, 아들은 광세지. 어렵겠지만 꼭 좀 찾아주게"
함남 함주군에 함께 살던 동생을 만나러 가는 엄수찬(72.경기 수원시 팔달구)씨도 사정은 마찬가지.
"내가 북에 간다니까 동창들이 사진과 가족 명단을 건네주면서 수소문을 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하더군요"라며 "한 고교 선배는 수소문을 하다 '막내동생 간장이 좋지 않다더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간장약을 갖다주라고 부탁했다"고 소개했다.
형제들과 다시 만날 김원찬(76)씨도 임동호(72)씨 등 실향민 친구 2명이 찾고있는 가족들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넘겨준 메모지를 짐보따리속에 고이 간직해뒀다.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한아름 담은 방북 이산가족들의 짐꾸러미는 이런 안타까운 사연까지 함께 실려 더욱 두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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